세종대왕 비판 : 부민고소금지법(수령 고소 금지법)



태종 재위기간인 1410년에 실시되었다가 

반발이 심해 일시 폐지되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세종 때 다시 시행된다.

이 법을 제안한 사람은 허조로 태종~세종대 최고의 예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송골매 재상'이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퍼진 이야기는 허조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세종이 들어 주었고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오는데,

→세종 9권, 2년(1420경자/명 영락(永樂) 18년) 9월 13일(무인) 4번째기사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대에선 이 법안을 들어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군주가 아니었다'라는 

비판도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피해주는걸 용납치 않은 전근대

유교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정권이다. 

고려까지도 지방은 그 지역의 토호와 향리가 대를 이어서 계속 통치를 하고 있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현은 물론이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도 

향리가 군사, 행정실무를 수행하는 읍사(邑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지방세력의 권한이 강했다. 

고려가 안정적일때는 

적은 비용으로 쉽게 지역여론을 장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무신정권이후 중앙정계가 흔들리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처음부터 국왕 대리인인 지방관의 권한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이 지방에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힘들었다.

지역마다 제도가 다르니 조세는 형평성을 잃었으며 

권문세족의 침탈에도 취약했다. 

급기야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노비가 수령을 깔아보고 심지어 폭행하는 사례가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향리와 토호들은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안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몽골과 왜구와 침입으로 유민이 급격히 늘어난 고려 후기에는

한계를 여실히 나타내며 쇠락해갔다.



조선은 이러한 전 왕조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중앙집권화와 수령의 권한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이 법이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에게 불복하고 

중앙정부의 시책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치 않겠다는게 그 진짜 뜻 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없을 순 없겠지만 

조선 정부는 무신정권 이후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방행정 확보가 무력화된 상황을 극복하려면 

이 정도 법안이 필요하며, 그로인한 효과가 폐단보다 크다고 보았다. 

강화된 권위를 가지고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중앙정부에서 부여받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축적했다.

이는 공법을 비롯한 세종대의 여러 국가시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조선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괜히 세종실록에만 세종실록지리지가 붙어있는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 법이 있다고 고소를 안한게 아니다. 

법이 있건말건 무시하고 고소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1429년에는 고소가 끊이지 않는 수령은 장100대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던 세조조차 

별것 아닌 일이나 허위로 신고하는 폐단이 너무 심해져서 도로 부활시켜야 했다. 

게다가 법이든 뭐든 상관 않고 철판 깔고 고소하는 사람뿐 아니라, 

법적 절차로 전가사변이라는 형벌을 새로 신설해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최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즉 부민고소금지법 하나 믿고 갑질했다가는 

야인들이 득실거리고 추운 변방으로 끌려가야 했다는 것. 

세조 때 잠시 폐지된 원인도 이 법이 원래 폐단이 심한 법이어서가 아니라 

쿠데타 과정에서 막강한 특권층을 형성시키고 

이들을 쳐내지도 않은 세조의 통치탓에 

특권층과 결탁한 이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수령고소금지법의 폐단을 심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세조 시기 지나치게 비대해진 특권층과 지방세력의 충돌은 재위 말년 이시애의 난이란 사단을 불러온다.




또 조선에서 수령의 수탈이 심해진건 어디까지다 매관매직이 일상화되고

모든 견제 수단이 사라져 수령권이 크게 강력해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굳이 따지면 조선 명종~선조 전반기도 각종 군역과 공물 부패가 심각했던 시기이긴 했다.



이렇게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임진왜란 때 수도가 점령당하는 초유의 사태 때도 버텨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꾀할수 있었다

→한 예로 임진왜란때 경상도 좌병사 이각이 도망쳤는 데 그 자리에 박진이 앉고 업무를 시작하자 흩어졌던 이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해서 의병과 관군이 연합해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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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 사민 정책



4군 6진 개척 당시, 

삼남 이남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은 북쪽으로 가는걸 회피하기 위해 

심지어 자해까지 벌였지만, 

세종은 자해한 백성들까지 강제로 북쪽으로 올려보냈고, 

그 과정에서 돈있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주한 백성들은 그 날로 수천 명이 죽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고, 

야인들도 야인들이지만, 

중국사신들에 대한 접대비용으로 수탈당했고, 

흉년이 겹치고 역병까지 돌아 또 수천명이 죽었다. 

세종이 개척한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당시 그 때문에 세종대왕에 대한 원성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성은 높았지만, 

당시 변방의 사정상 사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정당화 시키는건 어디서 많이 본 논리지만 

세종대왕은 북방 개척을 위해 고려시대 동북 9성과 관련한 역사를 깊이 연구했고,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던 동북 9성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세종은 안정된 영토 확보를 위해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만큼 북방 안정이 시급했기에,

세종대왕 본인도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사민정책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본인이 직접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해서야 되겠느냐!" 라고 

버럭했을 정도로 그 집념은 대단했다. 

실제로 4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6진은 세종대에 성공했다

→ 후일 '니탕개의 난 같은 대변란이 함경도의 중심지역인 함흥평야까지 미치지 못한 데는 6진의 역할이 지대했다.


비록, 엄청난 고생과 희생을 들여서 얻어낸, 

넓이도 작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땅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농사조차도 못하는 그 시대로서는 아주 쓸모없는 땅이다.




세종대왕은 한반도를 완전하게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다.

다만 함경도에 대한 차별이 이어져 마침내 임진왜란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에 넘겨지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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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대외교

세종대왕은 지금에 와서야 

훈민정음 덕분에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대왕 역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심지어 사신 접대에 과중한 비용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소에

라고 답한 사례가 있긴 하다.

대국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백성의 곤궁함은 가벼운 일이다

 그의 통치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말도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게 세종이라고 진짜 백성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신의 모함이 두려워서 그럴수도 있다. 조선과 명나라간 관계가 괜찮아지기야 했다만 초반기만 해도 영락제 제위 시절이고 그나마 나중에 선덕제 그 다음이 정통제 시기라 정복은 줄어들었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명나라는 이때 전성기 시기로 조선은 굽신거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명나라가 쳐들어오면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세종대왕도 이런 사신들을 안좋게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명 황제가 사신의 과도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그 즉시 사신들의 요구를 많이 쌩깠다. 실제로 조선에서 조공으로 바치라고 하는것보다 사신의 요구가 더 큰 부담일수가 있던게 사신이 서너개의 궤짝(상자)를 들고 와서 200개의 궤짝을 들고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명나라는 활발한 정복전쟁 중이었고, 

명은 당연하게도 조선에 대해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태종 때부터 쇄도한 공물은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은 그 많은 군수품과 공물을 대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는 없었다. 

명은 공물 뿐 아니라 말이나 환관, 심지어는 처녀까지 요구했고, 

그 때문에 딸 있는 집안은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기에 바빠서 

매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명나라 황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발되었는데도 

기록들을 뒤져보면 당연히 기피했던 것 같다.

기록에 명 사신 앞에서 대놓고 

병신 흉내를 내기까지 해서 명 사신이 벙쪘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왕이 고려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왕위를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뭇 사람들이 원나라 황실에 줄을 못대어 안달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

→이런 공녀제도가 폐지된 건 성종 때이다.

사냥을 좋아하던 명의 선덕제는 조선의 해동청과 큰 개, 스라소니를 원했고, 

조선의 모든 지방관들의 1차목표는 바로 해동청, 큰 개, 스라소니의 포획이었다. 

당시 조선 8도가 선덕제의 요구로 인해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끄러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명 사신접대에 대한 과도한 지출도 대단한 문제였다.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백관과 왕이 한 데 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 다음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당연히 그 잔치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때문에 길목인 황해도 지방은 후유증이 상당했고, 

도적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세종 시대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이 정상화 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일단 명에 보내는 공물이나 예물 중에서 금과 은을 제외하게 된 것이 

세종대왕 때부터 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이나 은은 화폐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은 경제에 심한 부담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로비를 통해 조선출신 환관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옛날에는 조금 나왔는데 이미 고갈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조공 항목에서 금은을 삭제한 것은 큰 공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금과 은이 산출되는 것을 알게 된 명은 본격적으로 금과 은을, 특히 당시의 기축화폐이던 은을 바칠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대는 조공물품인 10만냥의 은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지역의 군벌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원군 파병이나 자신의 약한 정통성 문제로 약점을 잡힌 처지라서 내놓으라는 대로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더욱이 세종 후기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개인 선물(=로비) 역시 

황제의 명으로 금지되었고, 

환관 출신 사신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여러모로 문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대명 사대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고,

특히 태종 이후로는 더 굳어졌다. 

영락제나 조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세종 조선의 조공 정책은 조선에게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세종대의 명나라 황제는 바로 그 영락제.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하고 몽골과 베트남까지 원정을 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바다 멀리 골치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먼치킨급 인물이었다.

따라서 주변국이 개기면 바로 짓밟아버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뻘짓을 했다가는 명나라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의 남월(베트남) 정벌을 보고 식겁한 장면이 나오고 

세종 대에 들어서 결국 독립한 베트남을 보고 기뻐하면서 

대놓고 황제를 신하들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까짓거 한판 붙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또한 이러한 세종의 지성사대론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국'인 명에 대한 지극한 사대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즉,"내가 이렇게 명나라를 잘 섬기니 

니들도 이를 본받아 나를 극진히 섬겨라"라는 식의 메시지라는 것.

이런 모습은 조선왕조 대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모토가 자성사대인 만큼 이것은 정말 좋은 명분이다.


흥미롭게도 명나라에서도 

태평성대였던 조선을 어느 정도 경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일어난 어여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의 왕이 어진 이로 번창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다."하여 

관련자들의 출국을 금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여말선초에는 명나라와 사이가 험악하기도 했었고,

"혹시, 조선이 쳐들어오지 않을까?"하고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을 보면...



무엇보다 세종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용주의자임과 동시에 조선주의자였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훈민정음》이나 《칠정산》을 만들 생각도 없었을 터, 

비록 당대 명나라가 그 영락제 치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라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을 뿐,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내내 조선의 정체성과 실리주의를 지속히 강조했으며,

이 태도는 문종과 세조에게도 이어진다.

→다만 영락제 사후 선덕제도 전술했듯이 영락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에게 꽤 많은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선 해동청 잡아올리느라, 공녀 뽑기, 사신 접대하기 등으로 전국이 들썩거렸다. 사대외교가 순전히 실익 정책으로만 자리잡은 것은 선덕제 사후다.

→특히 세조 시기에는 야인들과의 교류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명 사신의 요구를 함경도 관찰사가 알아서 무시하는, 일부 양반계층의 지성 사대론이나 현대의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도 일어났을 정도로 발전했다. 임진왜란 이후론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다시 안습해지지만...


또한 당시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순장 풍습을

"아무리 중국의 풍습이라지만 이뭐병이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당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꼬장의 대가 허조가 대표적이었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홍희제 즉위하자 

영락제를 위해 영락제가 총애하던 

조선인 궁녀 한씨를 비롯한 궁녀 15인을 

순장했단 말을 듣고는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 말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데 

황제의 무덤에 궁녀 15인을 순장했다니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것이 못되옵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명나라엔 

원나라의 "오랑캐"스러운 풍습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세종 후기 이후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무역흑자라는 실리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초중기 백성들의 고통도 분명 있었지만 

결국 조선은 이러한 조공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냈고,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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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 왕자들의 활동


세종은 집권 중반부부터 세자인 문종 외에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금성대군, 광평대군 등 

왕자들이 대외 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각종 연구 및 정책 수행을 맡겼다. 

위에 언급된 세종대왕의 업적에는 왕자들의 이런 조력도 상당히 들어간 편이다. 

아버지인 세종처럼 모두들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세종대왕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왕자들의 정치적 입지도 비정상적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왕자들 간의 대립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왕자들 간의 대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한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세종은 이런 위험성에 대해 둔감한 편이었다. 

[태종의 안전장치라함은 : 양녕대군이 그 망나니 짓을 해도 질책하고 충고할지언정 마지막까지 그를 세자로 남겨뒀다. 적장자인 양녕이 어떻게든 세자 자리를 지키고 왕위에 올라야 형제 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던 것.]

신하들이 이 점을 지적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경계하지 않았다. 

세자 문종과 세손인 단종의 정통성이 

워낙 확실했기 때문에 안심한 것으로 추측한다. 

적장자 계승이라는 정통성을 놓고 볼 때 

원손-세손-세자 테크를 탄 단종보다 더 정통성이 확실한 국왕은 

조선 시대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의 생각과는 달리 문종이 너무 과로한 나머지 요절해버렸고, 

세자빈 문제로 단종의 나이가 어린데다 

단종을 지원해줄 마땅한 왕실 어른이 없는 점 등이 방아쇠가 되어 화를 불러왔다. 

다른 왕자들, 특히 수양대군의 야심은 그 도를 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계유정난.


사실 이 왕실 종친의 권력 문제는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복잡하다. 

삼국지에서 위나라의 조조가 환관들을 싫어해서 힘을 주지 않았고 

힘을 준 종친들도 늙고 병들어서 죽자 황제를 보호할 울타리가 사라졌고

그 영향으로 힘을 키운 사마의가 일으킨 쿠데타로 너무 쉽게 무너졌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서진의 황제 사마염은 

자기 종친들에게 너무나 많은 힘을 주었고 

이는 팔왕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남•북조 시대가 된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할때 까지 

혼란을 피할수 없었던 걸 보면 

종친의 힘을 적당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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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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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업적도 정말 찬란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업적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성군으로 포장된 세종이 아닌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비판이 존재하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성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맞다. 

포장이 아니다. 

오히려 업적으로보면 광개토대왕보다 더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군주이다.



사실 세종에 대한 비판점으로 제기되는 정책들은 

세종이 15세기, 

전근대 왕정 시대의 군주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요소가 많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성군'이라는 이미지에 안 맞는 몇몇 행적 때문에 

확 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행적도 조선 초기 당시의 상식과 관점에서는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잊은 채 세종을 다룬 각종 미디어매체에서 

세종을 15세기 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이상적인 지도자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세종의 진면목을 

제대로 묘사한 미디어매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처럼 

조선왕조에 현대 사회를 투영한 채로 바라보다 보면

아래와 같은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세종이 15세기 군주의 모습이라기엔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혁신적 면모나 시대를 앞서나간 발상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사실이지만,

세종은 근본적으로 

현대 민주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15세기 조선의 왕이었고


그 시대의 요구와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정책들을 

입안, 실행하는 데에 충실했던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나 지금이나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세종의 진정한 장점과 리더십을 파악하고 

그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셈.











본인은 이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는 

역사를 많이 모르기에 심도있게 알아보고자 퍼온글이다.

흠... 먼가 너무 현대사에 입각해서 세종대왕을 리뉴얼한것에 대한 비판이지

그의 행실이나 그의 그릇된부분을 꼬집고 태클을 걸기위함이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당대의 왕이 당시대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고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다시금 선별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서 

읽으면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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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오매틱과 비슷한 메모리 에디터 프로그램.


97년 릴리즈된 2.0이 최신버전이며 제일 유명하다. 

홈페이지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는지 텅 비어있다.

치트오매틱과 구동방식은 똑같지만 검색된 메모리의 값을 나열해주며, 

동시에 여러개의 메모리를 찝어서 수정/고정 가능케 하는 추가기능이 있고, 

검색법도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어서 

익숙해지기만 하면 치트오매틱보다 훨씬 쓸만한 프로그램이다. 

쉽게 말해서 치트오매틱의 강화판.



이 메모리를 직접 열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치트오매틱의 경우 언제 값이 고정될 지 알 수 없이 

무작정 계속 값을 변경시켜야 하지만 

게임핵은 사용자가 값을 둘러보며

여러번의 검색 없이 바로 메모리 주소를 찍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비슷한 종류의 값의 경우 비슷한 주소에 저장되는 경우가 많아서, 

꽤 고속으로 메모리 주소 확보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RPG 게임의 캐릭터 능력치를 찾는다고 할때, 이미 찾아둔 힘과 체력값 주소의 첫 5자리가 0011A 라면 민첩성이나 지능을 검색했을 때 값을 바꿔가며 0011A로 시작하는 값 근처를 수색하면 금방 찾는 식.]


.



물론 게임핵도 결과내 재검색 기능이 있으므로 

주소값 후보가 적당히 줄어들 때 까지 재검색을 먼저 하는게 좋다.



검색시 1~8바이트나 플로트, 더블 등

메모리 사이즈를 정할 수 있는데, 

이는 목표하는 값에 따라 먼저 큰 선을 그어두는 역할을 한다...라고 하지만

중복검색이 되는 바람에 무용지물에 가깝다. 

그냥 닥치고 2바이트 아니면 4바이트에서 볼장 다 본다.




하지만 치트오매틱에는 없는, 

일치/증가/감소/불일치 라는 메모리값 필터가 상당히 유용하다. 

게이지바 같이 값이 따로 명시되지 않는 수치를 고치는 것은

이 기능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깝다. 

이 외에도 헥스코드 형태로 바로 검색하는 기능도 있는 등, 

여러 세부적인 기능이 충실하다.





그리고 수정을 위해 따로 뽑아둔 주소값의 경우 저장이 가능한데, 

메모리 에디터 특성상 쓸데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건 백업 기능이다. 

에디트를 하다보면 무리한 검색이나 값 수정으로 

게임핵이 터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럴 때 미리 찾아서 고정해둔 값을 날리지 않도록 하는 것. 

정식판이 아니면 이 저장을 할 수가 없는 제한이 있지만.. 

솔직히 대부분의 게임에선 잠깐 써서 수치만 고치고 끄기 때문에 별 의미 없는 제한.





게임핵은 XP에서는 98/Me 호환성 모드로 실행 후 몇가지 설정을 바꿔주면

잘 돌아가고, 

윈도우 7에서도 마찬가지로 호화성 모드를 통해 게임핵을 실행시킬 수 있다.

 (64비트라도 상관없다.) 

다만, 윈도우7에서는 gh파일을 불러오는 기능을 사용하면 

강제종료되는 문제가 있어 사용에 지장이 있다. 

이 기능을 사용하려면 가상머신의 Windows XP를 통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이 귀찮다면 치트 엔진을 사용하면 된다. 

윈도우7에서도 잘 돌아가고 게임핵 세이브 파일도 그대로 사용가능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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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전에 등장하는 사람 뿐 아니라,

현대 매체에서 중요하게 각색되는 사람들...


1. 홍상직 - 아버지. 홍징은 할아버지 성명이다. 

소설 이후로는 홍정승 혹은 홍판서이라는 성명으로 각색된다.


2. 홍인형 - 소설에서 형으로 등장하는 사람. 

소설 이본에 따라서는 홍길현이란 성명으로 나오기도 한다. 

따뜻하고 강직한 성품으로서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그 덕분에, 도적이 되어 버린 홍길동의 일탈성 면모를 느끼게 하는 사람.

주인공에 대비되는 사람을 무조건 찌질이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소설다운 가치를 잘 보이는 인물인 덕분에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라서 실재한 사람의 성명이라고 믿는 사람이 꽤 많은 만큼 

바람직한 형을 대표하는 캐릭터. 

모티브는 실재한 사람 도적 홍길동의 둘째 형인 홍일동


3. 백운도사 - 사람을 죽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홍길동에게 

도술을 가르쳐 준 선인.

원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홍길동에게 스승 자체가 없으나

왜인지 매체에서 자주 나온다.




4. 마숙 - 홍길동의 부하로 율도국을 정복할 때 후군장으로 공을 세운다.

홍길동이 왕이 되는데 1등 공신 격이지만, 

매체에서는 삭제되거나 악역으로 나오는 등 취급이 좋지 않다.



5. 차돌바위 -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를 창조한 화백 

신동우의 명작 <풍운아 홍길동>에서 나오는 사람. 

방자 스타일의 전형인 동료.


6. 덥석부리 장군 - 마찬가지로, <풍운아 홍길동>에서 나오는 수하. 

산적 버전 관우 이쪽은 신동우 화백의 개성이 강한 사람인지라 

변주곡으로 등장하는 때가 적은 편이지만, 

홍길동 자체가 현대로 들어서 가볍고 친숙한 이미지로 변하는지라 

주인공 대신 무게감을 잡아 주는 무뚝뚝한 산적이 한 명씩 나오는 편이다.



7. 곱단이 - <풍운아 홍길동>의 여자 주인공. 

청초한 여자의 전형으로서 홍길동에게 구출되어서 

도적단의 가사를 돕게 된다. 

후대의 현대 매체도 이렇게 청초하지만 

도적단을 돕는 여자 이미지를 답습하게 된다.


8. 돌순이 - 홍길동의 첩을 재해석한 캐릭터. 

방자의 여성 버전인 향단이의 변주곡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조선 왕조 시절에 나온 <홍길동전>의 여러 판본 중에서도 

활극에 어울리게 무예에도 능한 첩들이 있다.

현대에 가장 유명한 것은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돌아온 홍길동'괴작에서 나온 

히로인 2호. 

오타쿠 세대에게는 유일하게 건질 캐릭터라고 평가받는다. 

전형적인 새침데기 미소녀지만, 당연히 홍길동에게 퐁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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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 홍길동의 초능력


홍길동의 초능력


1. 분신술: 홍길동의 초능력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능력. 

분신들이 제각기 사고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번에 10명 이상 홍길동이 전국에서 활약하다가 단체로 잡혀와서 

대신들을 조롱하는 장면이 백미. 

그리고 아버지와 형을 구명하려고, 

대신들 앞에서 분신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모습은 

소설판 홍길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2.바람 술법: 바람을 만들어내고, 

국소적으로 날씨까지 조종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바람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악행을 일삼는 관리들에게 경고를 보낼 때도 돌풍을 사용한다. 

심지어 바람을 타고 행글라이더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묘사도 있다. 


3.환술: 환상을 보여주거나, 텔레파시 능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정신을 억압하는 해석도 있다. 

의외지만, 홍길동이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능력이다. 

일부 판본에서는 사이코메트리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보거나, 

심지어 독심술이나 예언능력을 가지기도 한다.


4.인형 술법: 분신술에도 사용하는 인형을 저주용으로 사용하는 능력. 

이걸로 사람의 육체를 강제로 움직이거나 

멀리서도 고통을 주거나 손을 대지 않고 죽여 버리기도 한다. 

본래 소설에 등장하는 성격과는 다르지만, 

후대의 각색 중 하나로 추가되었다. 그 대표가 개그 영화 〈슈퍼 홍길동〉.


5.퇴마술: 후반부에 율도국을 세울 때 대결한 상대. 

한국 요괴 문서에 나오는 거대 이무기, 

혹은 지하국대적(오우거와 비슷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귀신, 요괴와 엮일 때는 주문을 외워서 쫓아버리는 언급도 있다.


6.변신술: 일부 판본이나 현대 각색에서 등장하는 능력. 

사람, 동물, 무생물로도 변신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일본의 모 거대로봇으로 변신하는 황당무계한 개그 만화도 있었다. 

단순히 다른 사람처럼 변장을 하는 능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은근히 여장 속성이 있는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이, 소설에서 나오는 묘사만 해도 초능력자 혹은 완벽초인 수준이다. 

소설 홍길동전의 백미는, 

이러한 슈퍼 파워를 가진 의적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뇌하는 과정에 있지만 

결국 고국을 떠나서 무인도에다 이상국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면, 

강력한 영웅 한 명의 힘으로도 세상은 바꿀 수 없다는 교훈까지 보인다. 

정말로, 현대의 슈퍼 히어로들의 스토리와 똑같다!





화백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 이후에는, 

파란색 쾌자를 입고 초립을 쓴 보부상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백성답게 흔히 생각되는 복식이기 때문에 

창포검과 함께 홍길동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머리에도 조선 시대 백성이 흔히 사용하던 고름 달린 흰색 두건을 맨다.

현실에 알맞게 묘사하려는 매체에서는 살구색, 붉은색 외투를 입히기도 하지만, 

역시나 홍길동하면 푸른 계통의 외투를 입혀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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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홍길동 면모



도적이면서도 무술, 학문, 점술, 용병술, 초능력에 두루 능한 천재형 사람이다.

이는 실존했던 홍길동도 나쁜 짓 했던 것을 빼면 

권력층의 서자로서 제법 훌륭한 지략을 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설이나 소설에서나 지략파 의적으로서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홍길동의 활약은 마을, 군대,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외국의 전설에 나오는 도적들과 비교해도 스케일이 큰 편이다. 

→단 대륙의 기상인 수호전과는 물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수호전은 두령만 108명이고 졸개는 만 단위로 헤아리니... 중국은 자국 내 다툼조차 웬만한 국가 간의 전투 규모라서 그럴 수 밖에 없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지략 면에서는 웬만한 영웅들보다도 훌륭하지만 

마지막에 왕을 세우고 첩을 만들었다는 언급 때문에 

개혁을 이룬 사람이 아닌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는데

아나키즘 같은 사상조차 무턱대고 왕을 없애서 이상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없애서 사회를 발전하게 하자고 주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홍길동의 행적을 겉으로만 착한 체한다고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다.

→당초 이상향이라는 것도 그 상상력이 발휘된 시대의 한계에 종속되는 것인데, 이를 현대의 정치관-윤리관에 따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노예제가 있고 전쟁하기도 하고 식민지도 만들고 억압된 사회이기까지 한데?



단순히 탐관오리들을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벼슬에 진출해 나라를 침략하는 오랑캐를 토벌하거나 

새로운 이상국을 세우는 행보만 봐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당장에 홍길동이 상대하는 단위는 대부분 군대인데 

살상 행위는 갈수록 준다는 점만 봐도, 의외의 깊이를 부여한 캐릭터이다.




전설 대다수에서 홍길동은 초능력만으로도 최강이라서

스토리 대다수가 자신의 정체성 탐구 및 세상과의 싸움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외 여타 도적 설화와 크게 차이 난다. 

RPG에 비유하면 고레벨 시프+메이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바꾸려는

스토리에 가깝다. 

중세 소설인데도 괜히 고평가받는 게 아니다.



소설에서도 홍길동은 상황이 꼬인 끝에 사람을 몇 명 죽이고 괴로워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겸손하고 선량한 의적으로 바뀐다.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를 창조한 화백 신동우의 명작 만화 

<풍운아 홍길동>부터는 아예 사람을 죽이지 않는 불살을 지키는 의적이 되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홍길동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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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주인공 

홍길동!

홍길동전의 주인공으로 초능력이 있다. 

허균이 동기로 삼은, 연산군 통치기에 활동한 도적인 홍길동과는 발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이것은 저자인 허균이 두 사람을 분리하기 위한 장치인 듯하다.


물론, 실재했던 홍길동도 후대에는 의적이자 영웅으로 일부 반가에서 인기가 있었다. 

소설을 지은 허균은 이러한 평판을 빌려서 

조선 시대의 계급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안티 히어로로서 의적 캐릭터 홍길동을 창조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홍길동이 안티 히어로라는 말이 어색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실재한 사람부터가 도적이고 소설 내부에서도 홍길동은 초반에 온갖 소동을 일으키면서 노비의 자식이라는 혈통에도 율도국을 세우면서 계급 사상을 완전히 비트는 결말을 보이는 주인공이다. 참고로, 당시 오락 소설들은 주인공들의 핏줄이 죄다 죄다 입신양명을 부르짖는 유교다운 선비의 혈통을 강조할 정도로 유교 사상에 찌들어 있는 상태였다.


실제 홍길동은 연산군 통치기에 때 활동했으나 

홍길동전은 문종 통치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소설 도입부는 조선조 세종 (1397 ~ 1450) 통치기에 태어났다는 내용이지만, 홍길동이 청년이 돼서 활동한 시대를 계산하면 문종 시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소설 속의 설정이다


다만, 실재했던 홍길동은

오히려 높으신 분들의 인맥을 활용했던 

지능형 범죄자에 가까워서 소설의 주인공과는 정반대지만, 

소설의 평가는 당대 양반들에게도 교훈적으로 받아졌다. 

즉, 실재한 홍길동도 서자라는 한계 때문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비뚤어진 행보를 보인 것을 아깝게 여긴 듯 하다.

'홍길동이 도술을 부릴 수 있다'라는 설정도 유명한데, 

이는 실존했던 홍길동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생겨난 전설들을 차용한 것이다. 

홍길동이 역경을 만나고 고뇌할 때마다 

보이는 배경 묘사가 명장면이라서 소설다운 가치도 높다. 

현재까지 수많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대표 히어로라고 하면,

의적으로 각색된 홍길동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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