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던전 진행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루 한번만 가능하며 

추가 입장은 불가능하며 

진행 도중 일시정지도 할 수 없다.

 

각 영지 지역별로 몬스터 1~3마리를 

길드원 전체가 레이드를 뛰는 형태로 

길드원이 싸우고 있는 동안

다른 길드원은 입장할 수 없다.


 영웅들의 디버프는 레이드나 심연의 탑 15~30층처럼 아예 통하지 않는다. 단 플스와 펫을 이용한 방깎은 인정되므로 고득점이 목표라면 사황펫 유가 강제된다.


입장하면 3분 동안만 공격할 수 있는데 

몬스터들에게 상태이상을 거는 스킬이나 

물리 or 마법 면역 패시브등이 있기에 

잘 보고 덱 구성을 신경써야한다.

3분이 지나면 강제로 아군이 전멸하고 진행이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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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던전 순위 보상

시즌 2부터 추가된 보상으로,

클리어시 각 스테이지별 1~3위는 골드를 얻을수 있다. 

역시 후반으로 갈수록 보상이 올라간다.

영지

1

2

3

4

5

6

7

8

1위

10만

15만

20만

25만

2위

8만

12만

16만

20만

3위

6만

9만

12만

15만



길드던전 시즌 보상

시즌이 종료될 때 각 길드의 길드원에게 순위에 따른 시즌 보상을 지급한다

순위 판정 기준과 시즌 보상은 다음과 같다.

 

순위 판정 기준

1 : 현재 진행중인 스테이지.

2 : 총합 누적 피해량.

    같은 스테이지를 진행중이었다면 

    그 스테이지에서 더 많은 피해를 준 길드가 더 높은 순위를 갖는다.

3 : 플레이한 누적시간.

4 : 누적 도전 횟수.

시즌 보상

순위

보상

순위

보상

1위

2,000만 골드
2,000 루비
200 토파즈

2위

1,500만 골드
1,500 루비
150 토파즈

3위

1,200만 골드
1,200 루비
120 토파즈

4~10위

1,000만 골드
1,000 루비
100 토파즈

11~20위

800만 골드
800 루비
80 토파즈

21~50위

700만 골드
700 루비
70 토파즈

51~100위

600만 골드
600 루비
60 토파즈

101~200위

500만 골드
500 루비
50 토파즈

201~500위

350만 골드
350 루비
35 토파즈

0~2%

300만 골드
300 루비
30 토파즈

2~5%

250만 골드
250 루비
25 토파즈

5~10%

200만 골드
200 루비
20 토파즈

10~20%

150만 골드
150 루비
15 토파즈

20~30%

100만 골드
100 루비
10 토파즈

30~40%

80만 골드
80 루비
8 토파즈

41~100%

50만 골드
50 루비
5 토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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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던전 지역별 몬스터 구성


여기서는 지역별 몬스터 구성을 서술한다

각 시즌마다 무슨 특수 능력을 가질지 모르므로 주의

 

지역몬스터 구성
1-1푸키(3성)
1-2아리(3성)
1-3포포(3성)
1-4포포(3성) 아리(3성) 푸키(3성)
1-5페페(4성)
1-6폰(3성)
1-7베스킨(3성)
1-8베스킨(3성) 폰(3성)
1-9베스킨(3성) 베스킨(3성) 폰(3성)
1-10호킨(4성)
2-1셀롭(3성)
2-2실롭(3성)
2-3나미(3성)
2-4나미(3성) 실롭(3성) 셀롭(3성)
2-5스모키(3성)
2-6바벨(3성)
2-7코쿤(3성)
2-8코쿤(3성) 바벨(3성)
2-9코쿤(3성) 코쿤(3성) 바벨(3성)
2-10라쿤(5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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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적


절망의 신선 카르마(★★★★★★) 

여왕 엘리시아(★★★★★★) 

역사의 기록자 노호(★★★★★★) 

총운검의 주인 에이스(★★★★★★) 

투전승불 손오공(★★★★★★) 


6성 세나 보석 얻고 다음층 올라가야하는데 140층 깨지네요.. ㅜㅜ


무한의 탑140층 1275회 도전--실패... ㅜㅜ



특수한 조합: 손오공 보통모험 최적덱


 

 

충격과 공포의 층 3


에이스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미친 딜량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빠른 에이스 처리가 관건이다.

 

버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오공의 분신 능력치는 리메이크 후인 

본체의 90%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각성 벨리카가 상당히 활약하는 층이다.

마방 증가도 그렇지만, 어둠의 화염으로 

쿨증을 넣고 노호의 잘못된 기록으로 피흘리는 일 없이

두 명을 피1로 만들고 라운드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의 화염이 오공에게 맞지 않는다면 

곧바로 오공의 미친 딜이 날아오게 된다

그리고 오공 보진이기 때문에 매우 높은 확률로 오공은 스킬을 맞지 않는다.

그리고 기록이 에이스한테 들어가지 않으면 그 판이 상당히 위험해진다

운이 좋아서 에이스한테 들어가더라도 다른 버퍼가 살아있으면 

오공의 딜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딜러를 각성 세인으로 사용해도 깰 수 있다.

이 경우엔 높은 확률로 맨 처음에 에이스를 짜르고 시작할 수 있지만,

에이스를 죽인 이후 4명이 남아서 

불새가 오공한테 안들어가면 딜을 감당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방덱 팀구성은 

딜러를 노호나 각성 세인

앞줄은 레이첼, 각성 니아, 각성 카린, 각성 벨리카를 쓴다

예외로 니아 대신 각성 크리스를 데려가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은 1,2라운드를 2힐러로 더 편하게 깨지만, 턴감기가 없어 

3라운드에서 불새를 못 먹이므로 

카린과 크리스각성기로 버티면서 깨는 방법이다.

 

기본적인 공략은 1,2,3라운드 동일하게 

벨리카 쿨증-기록(귀신베기)-메가다이버-불새 순으로 진행한다.

그 이후에는 유동적으로 진행하면 되지만,

1순위가 쿨증이고, 2순위가 힐이다.

오공이 맨 매지막에 잡히는 경우가 많은데

오공 분신이 나올 때부턴 적당히 힐쓰면서 쿨관리,선스킬작업을 하고 넘어가면 된다.

딜러가 각성세인일 경우,

세인의 각성기는 3라가기 직전에 써서 3에이스를 빠르게 잡아주면 된다.

 

3라운드는 이전 라운드와 공략법이 약간 다르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별빛낙하가 상당히 거슬리는데

이때 니아의 각성기를 이용하면 넘길 수 있다

3라운드까지 카린의 각성기가 남아있으면

힐보다 귀신베기와 기록을 우선으로 사용

최대한 많이 잡아준 후에 카린의 각성기를 쓰면 된다.


카린 각성기 타이밍은 카린 제외 앞줄이 전부 죽었을 때가 최적이다.


마지막으로 오공분신이 나오면 메가다이버로 잡아준 뒤에 적당히 놀면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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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탑 140층 실패 원인 분석중..







노호 보진 각 크리스, 샤오, 각 카린, 각 니아 +친구 _ 각 크리스


노호 보진 각 크리스, 샤오, 각 카린, 각 니아-실패


노호 보진 각 리, 샤오, 각 카린, 각 니아 +친구 _ 각 크리스

노호 보진 각 리, 샤오, 각 카린, 각 니아-실패


무한의 탑 140층 실패

벌써 1265회 실패를 하고 5개 열쇠가 채워지자.. 다시 황금의 방에 들이대고 있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걸 보고 공부를 해야겠군요.. 근데 제가 각성 벨리카가 없어서.. 흠..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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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나이츠 M/V



3주년 기념 애니메이션 "7월에 피는 꽃처럼"


일본 세븐나이츠 1주년 기념 애니메이션 영상을 가져와서 

노래를 수정, 삽입 후 올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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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한다.
1975년 10월 서대문구 연희동의 남쪽 일부가 분리되어 연남동이 되었다.
경성고, 홍익디자인고가 있다. 
랜드마크는 딱히 없지만
상업화된 홍대에 질린 사람 및 젠트리피케이션에서 밀려난 
진성 힙스터들이 맛집을 찾으러 가는 동네가 되었다. 
경의선 숲길이 생긴 이후로 상권이 자리잡고 있는 중. 
이외에도 동진시장이라는 힙스터 프리마켓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젠트리피케이션 : Gentrification. 상류층(신사)을 뜻하는 gentry 에서 파생된 말로 "낙후된 지역을 고급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선 임대료가 저렴한 낙후된 지역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고 지역이 발전하면서 기존에 거주 중이던 원주민을 밀어내는 현상을 말한다.



요즘 연남동에 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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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정의] 

조선 전기 세종대와 중기 인조대에 법화(法貨)로 주조, 유통된 주화(鑄貨, 銅錢). 


[내용] 

봉건 조선 정부는 왕조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고자 하였다. 

즉, 미(米)·포(布) 등 물품화폐와 칭량금은화(秤量金銀貨) 유통 체제를 극복하고 

포화(布貨)의 법화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저화(楮貨) 및 동전 등 명목화폐(名目貨幣)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조선 정부가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는 문제를 처음 논의한 것은 

개국 초인 1394년(태조 3)이었다. 

그러나 1401년(태종 1)에 저화를 동전보다 먼저 법화로 결정, 유통 보급시켰다. 

저화를 유통 보급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저화 사용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1415년에 동전을 주조해 저화와 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체제를 본떠서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하기로 했던 그 당시의 계획은 흉년 등이 원인이 되어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뒤 1423년(세종 5)에 이르러 저화의 통용이 사실상 중단되자

이에 대응해 동전을 주조, 유통하기로 하였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동전을 주조, 발행해 

종래부터 사용되던 저화와 병용하려는데 있었다.



 그 당시 의정부와 육조의 합동회의에서 

태종대에 실현을 못 본 당나라의 개원통보 체제를 본떠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할 것과 동전 주조사업은 사섬서(司贍署)에서 

관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통보를 주조하는 일에 착수했으나 

그것을 유통 보급시키기에 필요한 수량을 주조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던 것 같다. 

동전 원료의 공급난, 동전 주조시설의 미비, 

동전 주조기술의 미숙 및 기술자의 동원난 등이 

동전 주조사업 부진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서울과 경상좌도·경상우도 및 전라도의 여러 곳에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시작한지 4년만인 1427년에 겨우 동전 40만냥을 주조하는데 그쳤다. 

봉건 조선정부는 명목화폐인 동전, 

즉 조선통보에 법적 통용력과 경제적 신용을 부여해

공·사유통계에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즉, 동전의 유통량을 조절하고 

동전의 공신성(公信性) 내지 태환력(兌換力)을 강화하는 한편, 

각종 세납(稅納)을 금납화(金納化)하고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를 처벌하는 등 여러 가지 유통 보급 방법을 써 보았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가지 방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동전의 유통가치는 폭락해 

동전을 유기(鍮器)의 원료로 사용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봉건 조선 정부는 왕조 초기부터 저화와 함께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해보았다. 


그러나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는 

사회 경제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 정책의 모순성 등이 

직접적·간접적 이유가 되어 계속 유통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쌀·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금은화 등이 유통계를 전과 같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했던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 선례로서 

그 이후의 조선 사회가 동전 등 명목화폐를 수용하는데 필요한 잠재력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봉건 조선 정부는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 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려고 했던 중요한 동기는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사회 경제 발전에 대응하는 한편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 경제를 재건하려는데 있었다. 


이와 같이, 동전을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633년(인조 11)에 다시 동전, 

즉 조선통보를 법화로 주조, 유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주조, 유통된 조선통보는 명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또한 세종조에 주조, 유통했던 조선통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로 주조하였다

이 동전은 서울의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34년에는 안동·대구·개성 등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인물이 번성하며 상품유통이 원활함은 물론 

동전 원료 및 시탄(柴炭 : 땔감이나 연료)의 공급이 편리한 지방에서 

주조, 발행하게 하였다. 

봉건 조선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서울과 각 지방에서 주조, 발행한 동전을 유통 보급시키려 하였다.

즉, 동전을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국가의 화폐 정책에 대한 일반대중의 만성적 불신감을 불식하고 

동전의 공신성 내지 태환력을 강화하며 

대소 상거래에 동전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화폐가치를 주지시켰다. 

동시에 국가의 사소한 수납과 지출의 화폐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화폐 유통 정책은 

사회 경제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화폐 정책의 모순성, 

정부 지도자들의 파쟁의식 등 

국내적 요인과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이 직접적·간접적 원인이 되어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조조에 팔분서 조선통보를 주조, 유통했던 역사적 경험은

17세기 50년대를 포괄하는 효종조의 화폐 정책 운용에 있어서는 물론,

1670년대 말부터 상평통보(常平通寶)가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 

계속 유통 보급되는데 큰 잠재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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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 화폐개혁


비판받아야 할 시책이라면, 

이미 자기 아버지인 태종이 하려다가 처참히 발렸던 화폐개혁 시도였다.

세종은 중국의(특히 당나라)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건국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것) 가 재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는데,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는 농본주의 조선에서 화폐경제체제가 

그리 쉽게 정착될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띄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 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조선은 상황이 달라 화폐개혁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량부족이었다. 

조선은 전 왕조에 걸쳐 고질적인 재정부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 태종이 먼치킨 취급 받는 것은 재정 흑자를 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국가 자체의 영세적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정부 재정확충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 조선 중후반기의 수령의 착취로 "조선왕조는 백성을 착취했다." 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아니다 그 거둔 세금은 거의 다 수령 주머니로 들어갔다.



게다가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거둔 세미를 전부 조운선을 통해

강이나 바다로 운반했는데, 종종 배가 침몰하여 

애써 모은 세미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기껏 운반해온 쌀도 습기에 젖어 불어버리거나 썩어버리기 일수였다.

이러니 충분한 화폐를 제조할만한 비용이 마련 될 리가 없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동전제조에 사용할 재료 마련도 힘들었다. 

전국의 금속이란 금속을 모아도 모아도 모자라 일본에 구리를 수입해오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동네북인 절을 또 두들겨 종까지 다 뺏어와 녹여야 했다. 


두번째는 조선의 교역경제 미발달이었다.

당나라 때를 비롯해 중국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유통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품의 양이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협소한 영토와 그나마도 산지가 많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풍부한 물자가 양성되지도, 그리고 그 물자가 유통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물자를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화폐의 필요성도 별달리 생기지 않았다. 

다만 조선후기에 오면서 상업과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평통보같은 화폐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최악의 화폐도 나왔다.

그러나 운반수단은 딱히 크게 발달되지는 못할 듯 하다.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운반수단대해 기록하고 있던 수레같은 경우 

쓰지 못하고 있고, 배에 대한 것도 낙후 되었있다고 한다.

(몰론 조선은 배 만든 기술이 많이 발전된 나라이지만 

주로 군사적으로 집중되었지 운반수단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국내 교역이 미약한 상태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외교역이 꾸준히 쇠퇴하는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 주장도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고려시대부터 사상들의 교역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해상무역 자체가 아예 소멸하고 

육로무역도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나 국경에 설치된 작은 교역소를 통한 교역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물물교환의 형식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이 가져간 물건을 진상하고

중국 황제가 이에 대한 답례물건을 하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무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가까워 제대로 된 거래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의 화폐 역시 별달리 유입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교역구조가 지금의 세계시장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명나라 역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의 구리화폐 역시 부침을 거듭했다. 

결국 문제는 구리화폐라는 속성이었다.


세번째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농공상의 사고방식이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별만 있었으므로 

이런 신분구별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도입된 유교에 의해 위의 신분구별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구별은 조선 중기 무렵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때문에 모든 경제구조가 농업을 위주로 돌아갔다. 

이러다보니 쌀이 자연스럽게 화폐의 위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상업이나 공업이 위축되어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만들고 

모자라는 물건은 쌀이랑 좀 교환해서 사오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화폐경제가 상당히 정착된 조선 후기나 구한말, 일제시대, 심지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농촌에서는 '쌀 팔아서 돈 사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쌀의 양이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재산과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척도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메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다만 이 화폐개혁의 실패이후 방치 한것으로 인해 선조때 전쟁이 발생하자 

동맹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화폐를 사용하지못하자

조선을 약탈하는 개판을 쳐놓는 결과를 불러오긴했다.


광해군의 수미법을 시작으로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와 여각등의 발달들이 계속되어 

영조,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경제가 가능했다. 

물론 그 사이에 최악의 대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과 같은 퇴보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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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사변 [ 全家徙邊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평안도나 함경도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 

조선 세종 때부터 북변 개척(北邊開拓)이 시작되어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키는데, 이에 응하는 자가 없자, 

그 정책의 하나로 전가사변을 실시, 

주로 함경도 오진(五鎭)으로 이주시켰음. 

이 법의 적용 범위는 문서 위조자•좀도둑•우마 도살자(牛馬屠殺者)•관리로서 

백성을 억압하는 자 등 

비교적 경범자를 대상으로 이민 정책의 한 방법으로 이용하였음.

 [유사어]전가입거(全家入居), 전가입송(全家入送).


 [네이버 지식백과] 전가사변 [全家徙邊]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용례

  • ㉠형조에서 제주판관 하준의 진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대명률≫에 도망한 종과 그들을 감춘 우두머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망한 사천과 그를 감추어 준 자는 다만 장 80대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만…문서를 위조하여 조상 때부터 내려 오는 노비라 하여 역가를 모면하고 이웃사람과 부동하여 감춤으로써 관리들의 판단을 현혹시켜 처벌을 피하기 때문에, 소송이 날로 번잡해지고 간사한 속임수가 날로 불어납니다. 마땅히 금법을 엄하게 세워 그 폐단을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대전≫에 도망한 공천을 받아주는 자는 전가사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천과 사천은 한가지인데, 죄는 같고 벌이 다른 것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앞으로는 사전을 가리지 말고 사천을 숨긴 지 해가 넘지 않은 자는 ≪대명률≫의 해당 조문에 의하여 처벌하고, 2명 이상의 도망한 사천을 해가 넘도록 부린 자는 ≪대전≫의 공천을 숨긴 예에 의거하여 평안도의 인구가 적은 고을로 전가사변하십시오.”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 刑曹 據濟州判官河濬陳言啓 律文 奴逃者及窩主同罪 故私賤逃亡者與容隱者 只論杖八十…詐造文記 稱爲祖業奴婢 謀免役價 與切隣人 符同隱諱 官吏亦眩於是非 不得杖訊 因此詞訟日繁 奸僞日滋 當嚴立禁章 痛革其弊 大典 公賤逃亡者許接人 全家徙邊 夫公私賤一也 而罪同罰異 有乖大體 今後勿揀赦前 容隱私賤 而未經年者 依律文科罪 二口以上經年役使者 依公賤許接例 平安道殘亡諸邑 全家徙邊 從之 [성종실록 권제134, 8장 앞쪽, 성종 12년 10월 9일(경술)] 
    ㉡무릇 소송 기간을 넘긴 사실이 3번이라 득신되었으면 소송 상대자를 이유 없이 호송한 죄로 논하여 전가사변하고 관리로서 결급한 경우에는 지비오결죄로 논하여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한다. ; 凡過限之事 三度得伸 相訟者 論以非理好訟 全家徙邊 官吏決給者 論以知非誤決 永不敍用 [수교집록 형전 청리]




[네이버 지식백과] 전가사변 [全家徙邊]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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