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 敬近堂과 玉牒堂)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종친부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종친이란 국왕의 친가 쪽 친척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정식 부인에게서 난 자손은 4대손까지, 후궁에서 난 자손은 3대손까지 종친으로 대우하였다. 종친부는 종친과 관련된 일들을 논의하고 처리하던 관아였으며, 국왕들의 족보와 초상화를 관리하는 일도 담당하였다.[현지 안내문 인용 및 일부 수정]


원래 종친부는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의 맞은편에 있었는데, 이는 건춘문이 왕족과 외가의 친척, 상궁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1981년 8월에 정독도서관 관내로 옮겨졌다. 건물은 본체인 경근당과 그 오른쪽 곁채인 옥첩당, 그리고 두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로 이루어져 있고 본체 앞에는 월대라는 넓은 단이 있다. 복도는 본채의 뒤쪽과 곁채 알쪽의 트인 공간을 서로 연결해주는데, 두 건물의 바닥 높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계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종친부 원위치로 이전 복원…20일 준공식, 《연합뉴스》, 2013.12.18.]


이 건물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관아건물 세 동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서울 중앙관청의 격식을 보여 주는 드문 사례다.

조선왕조 역대 모든 제왕의 어보(왕의 도장)와 영정(초상화)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제군(宗室諸君)의 봉작승습·관혼상제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는 ‘재내제군소’라 하였으나 여러 차례 그 명칭과 기능이 바뀌었다가, 세종 12년(1430)에 종친부라 하였다.


순종 융희 1년(1907)에는 이를 폐지하고, 이곳 사무를 규장각으로 옮겼다.


원래 삼청동에 있던 것을 1981년 정독도서관으로 옮겼으나, 2013년에 원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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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의 완벽한 연기 시너지! 
유쾌한 웃음과 진한 여운을 선사하는 <택시운전사> 2차 메인 예고편


INFORMATION 
제목: 택시운전사 
감독: 장 훈 
출연: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 외 
제공/배급: ㈜쇼박스 
제작: 더 램프㈜ 
크랭크인: 2016년 6월5일 
크랭크업: 2016년 10월 23일(82회차) 
개봉: 2017년 8월 

#택시운전사, #송강호, #토마스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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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 역마, 파발마.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말은 과거 국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나라의 강약은 말에 달려있으므로 임금의 부를 물으면 말을 세어서 대답한다


조선시대 말 한필은 노비 3명과 맞바꿀 정도였으며 국가적 재산으로 중요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말의 수요가 많아지자 전국에는 나라의 말을 기르는 '양마장'이 설치됐고 현재의 '마장동'은 말을 키우던 최적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마장동의 역사는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장동'은 말 그대로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있던 데서 그 지명이 유래됐습니다.


청계천을 끼고,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던 마장동.


질 좋은 풀을 공급할 수 있어 말을 기르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말 중, 암컷인 암말들은 자양동으로 수컷인 수말은 마장동으로 보내졌고 마장동에 위치한 양마장에서 말들을 기르고 관리했습니다.


그렇게 길러진 말은 주로 중요한 소식이나 명령을 전달하는 '파발마' 역할을 했습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하지만 이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최적의 조건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던 곳 마장동은 말이 가졌던 의미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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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1979년 10월 27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되었던 장기집권의 끝으로 정부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항하던 야권은 요동쳤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 신현확을 비롯한 인사들에게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현 정부는 박정희의 꼭두각시인 유신잔당이며 그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리더가 급작스레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지자한국 사회는 큰 변혁을 겪게 된다.


<박정희 사망 당시의 사회상>



1978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혁명 직후의 이란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로 돌아서자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고 그는 이란 사회의 혼란을 이유 삼아 팔레비 정권 당시 하루 6백만 배럴씩 생산하던 석유의 양을 하루 아침에 2백만 배럴로 줄여버림과 동시에 석유의 수출을 금지한다.




유신헌법 제정 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 집권 당시 시행하였던 이른바 '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 체제'로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차 석유 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다시 찾아온 석유 위기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또한, 한국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선언하며 YH무역에서 근로하던 여공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표이자 박정희에게 대항하던 유력한 야권 정치인 김영삼이

YH무역 여공들에게 시위를 할 수 있게끔 신민당 당사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여공들의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는데, 불행히도 여공 중 한 명인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신민당사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9월 16일


YH무역 사건 이후 김영삼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인터뷰를 받게 되는데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이 독재정권(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하며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 4일


위의 인터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그를 제명하기 위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징계동의안에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




김영삼의 국회 제명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과 마산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최규하의 등장>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그는 독립 이후 미 군정에서 공무를 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서 줄곧 근무하였던 착실한 공무원이었다.




김종필은 5.16군사정변 이전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5.16군사정변에 참여함은 물론이거니와 공화당의 창당을 주도하였고 박정희 정부 초기,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등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해왔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대통령 임기를 끝마친 후 다음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은 물론,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만들어내자 반발했다.



1971년 6월 4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 이후 대통령에 선출되자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발탁했다. 김종필은 절대 권력의 대통령 휘하의 국무총리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끊임없이 그가 박정희와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12월 18일 부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직에서 경질한다.


1975년 12월 18일


박정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최규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최규하는 김종필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과의 갈등으로 박정희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최규하의 대통령 취임>


이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내용을 전개해보자.


박정희 대통령 운구차.png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79년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경제불황과 석유를 포함한 자원문제는


우리 국내경제에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헌법문제에 관한 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정을 바라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조속한 시일 내에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루겠다. 2.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정부 방침으로 한다. 3. 최대한 빨리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하겠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의 담화에 반발했다. 이들이 최규하의 민주화 약속 담화에도 불구하고 반발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2. 유신잔당이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즉각 사퇴하라.



1979년 11월 24일


야권의 이같은 요구에 정부가 대응하지 않자 야권이 먼저 움직인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주축으로 하여 재야 인사 400여 명이 서울 YWCA회관에서 위장 결혼식 사건을 계획하고 이곳에 참석하였다.


그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척 하면서 일제히 정부를 규탄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등을 반대하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야 인사들을 미행하던 경찰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가 담화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고 최규하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에 피선되자 하루 뒤인 1979년 12월 7일, 1975년 2월 13일 부로 대한민국에 적용되고 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의결한다.


긴급조치 9호에는 개헌 논의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최규하가 이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가 합법이 되었으며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다.


<하나회 세력의 군권 장악>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에 의해 12.12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연행되고




국방부장관이었던 노재현이 물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백운택, 조홍 등 12.12사태에 참여한 하나회 인사들은 하루 뒤인 12월 13일, 일제히 직책이 변경되어 요직을 맡게 된다.




김재규가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직 서리를 하던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노재현이 물러난 국방부장관 직은 前 공군참모총장인 주영복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군권의 책임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관여하여 훗날 광주 민주화 운동 청문회 등에 출석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12.12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글에 담으면 내용이 너무 장대하게 되어 요약함


<서울의 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과 동시에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적용되던 가택연금 조치도 해제된다. 즉,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활동이 해제된 것으로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여 개헌 의지를 내보인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떄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도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는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 대통령 윤보선, 김대중 등 긴급조치위반자 687명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시행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자신이 당권을 잡고 있던 신민당에 입당하라고 하였으나 김대중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김영삼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야권은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동교동계, 재야 인사들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하는 신민당계로 분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학생들의 시국성토와 노사분규>







1980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자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주된 이슈는 병영집체훈련 거부 문제였는데,


당시는 대학교 2학년까지 군사교육(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일부 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리 과격화 조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0년 4월 14일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하였고


모두가 협력하여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12.12사태 이후 군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정부 내 요직에 겸직시킨 것이었다.







1980년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애초에 병영집체훈련의 거부로 발생한 시위를 철회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1. 계엄령 즉각 해제할 것

2. 유신잔당은 즉각 퇴진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사퇴할 것

4. 정부 주도 개헌중단할 것

5. 노동3권 보장할 것




1980년 5월 7일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연합 또한 정부에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계엄령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포기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퇴진할 것


이와 동시에 그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







1980년 4월 21일



노동계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제히 일어났다.

강원도 사북읍의 탄광 근로자 3500여 명이 사북 경찰서, 사북역 등을 점거한

사북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전국에 90여 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가 확산되어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노동계의 시위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9일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군의 투입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1.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겠다.

2. 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3.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 해제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아래의 사항을 정부에 요구한다.

1. 비상계엄 즉시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작업 포기할 것


더 나아가 김대중은 자신이 5월 7일 발표한 선언문에 정부가 답변하지 않을 시,


5월 22일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한국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같은 날인 5월 16일, 중동 순방의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다.


규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부장관 김종환,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전두환 등에게


자신이 중동 순방 중일 때 일어난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음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개최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시키지 않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현 상황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하나회 소속 노태우, 박희도 등이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 이 세 사람은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위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보고하였다.

전두환은 여기서 추가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과 '국회를 대신할 비상기구의 설치'를 요청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는 거절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야권과 학생들이 요구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대중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학생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으며 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적용받아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계엄군을 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5월 20일부로 가택연금 조치에 처해지게 된다.



1980년 5월 18일



부의 계엄령 확대조치에 반발한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야권 및 재야세력이 주장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0.26사태 이후 제주도에 적용되지 아니하던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김대중 젊었을 때.png 김종필 젊었을 때.png


학생들을 조종하여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였다는 이유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체포되어 연행됨과 함께 김종필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 인사들 또한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어 연행된다.




계엄령에 의해 전국 각지 대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였고 전남대학교의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시위를 주동하던 8명을 체포한다.


<5월 18일 - 최초 사망자의 발생과 유언비어>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학생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가격하고 구타를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이 날, 광주시민 김경철(28세)이 사망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5월 19일 - 최초 사격과 과격해지는 시위 양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 및 유포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에게 화염병과 돌을 투척하며 대항했고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검거하고 진압봉으로 가격, 군화로 차는 등


시위와 진압 강도가 5월 18일보다 한층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기관단체장들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진압 행동이 과격하고 어느 나라 군대인지 모르겠으며


고교생들 또한 동용하기 시작했으니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시위의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을 방송하지 않는 MBC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 차량 1대를 불태웠다.







5월 19일에는 최초 사격도 발생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사직공원에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다"고 계엄분소에 허위 신고를 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사직공원을 수색하였으나 이는 거짓이었고, 그들은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 내부에 있던 장교가 M16소총으로 장갑차 뚜껑을 열던 시민에게 공포탄 사격을 했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공포탄에 맞은 김영찬(19세)이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광주시민 김안부(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 MBC 방송국 방화와 경찰관 사망 사건>



5월 20일이 되자 아래의 유언비어가 적힌 유인물이 나돌았다.




1. 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2.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3.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시위대는 MBC 방송사에 광주에서의 사태를 방송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날 뉴스에서도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방영되지 않자

분노하여 방송국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송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한편, 노동청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파할 목적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버스를 몰았던 김갑진, 배용주는

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버스를 몰았는데 운전 도중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버스를 멈췄더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소요 사태가 격화되자 20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5월 21일 -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시위대의 광주 장악>




20사단의 광주 증파가 결정되자 20사단은 부대이동을 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시위대에게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를 탈취당한다.


그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구하던 정부는 이 날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에 대해 발표한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또한, 사태의 조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들어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해임되고 후임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임명되었다.




한편, 시위대는 사체 2구가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장형태 전라남도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장형태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는 도중


도지사가 광주시장인 구용상에게 "먼저 나가서 시위대를 진정시켜달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아닌 광주시장이 나타나자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흥분하여 화염병과 각목을 던졌고


결국 전남도지사는 시위대 앞에 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장형태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 여러분은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이에 시위대는 오전 12시가 될 때까지 계엄군이 광주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목적으로


버스를 몰아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초 실탄 사격이 발생한다.


사격 명령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시위대의 버스 돌진 공격으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버스 운전사가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전남 도처에 위치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하였고 무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의 출범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하였으며 LMG기관총을 이용하여


전남도청과 해산을 종용하는 군 헬기 등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계엄군과의 총격전까지 벌어지자


전교사는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켜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며


시위대가 전남도청을 장악한다.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가 총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군 차량 3대가 전복하였고 군인 2명이 사망,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무총리인 신현확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5월 22일 - 시민수습위원회의 출범과 시민군 내부의 갈등>


이날, 전남도청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수습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 본부에 찾아가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한다.

요구사항은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사후 보복하지 않으면 무장 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은 "모든 문제는 무기를 반납한 후에 논의될 수 있다"고 하였고 연행하였던 848명을 석방했다.

수습위원회는 협상 결과를 전남도청의 시위대에게 보고하면서

"무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반발하며 이들의 협상 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며 야유를 보내며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정부측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현확의 사퇴로 국무총리 서리를 하게 된 박충훈이 광주에 방문하여 특별담화를 녹음한 후 상경했다.




<5월 23일 - 계엄사의 진압 작전 논의와 총기 반납 논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진압 작전을 논의하면서 북괴 개입설을 제기했다.

"광주 소요 사태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북괴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상태"


시민군은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사체 58구를 전남도청에 전시하였고 시민군 사이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다.


온건파는 여태껏 회수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우선적으로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반납하였으나 그 후에는 강경파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24일 -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과 간첩 이창용>


이 날,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들 간에 오인사격이 다수 발생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아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하고,


공격받은 계엄군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발생한 것인데


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2명이 사망하였다.

오인사격으로 격분한 공수부대는 체포한 시민군 1명과


시민군으로 오인된 마을 청년 3명, 하수구에 숨어있던 50세 여성에게


총격을 감행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한편, 전남도청의 온건파는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고


계엄군 시내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을 약속받고


시민군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호소하였으나...



강경파는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전두환 화형식을 개최하고 가두행진을 하며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 북괴 간첩 이창용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간첩 이창용이 남해안에 침투, 광주에 들어가 선동 및 분란 행위를 하려 하였으나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 검거되었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창용이 첩보 행위의 목적으로 침투한 북괴 간첩이 맞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동 행위'라는 침투 목적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5월 25일 - 전남도청 독침사건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



전남도청의 시민군 중에 장계범과 정향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민군에 의해 북괴 간첩으로 오인받게 되었다.


이에 장계범은 "독침에 맞았다"고 주장하며 쓰러졌고


정향규는 장계범을 차량에 태워 전남도청을 빠져 나간다.



그들은 후일,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에 처해진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한 최규하는 "내가 직접 전남도청으로 가 시민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여 호소문을 녹음 한 뒤 상경한다.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칠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합시다.


<5월 26일 - 전남도청 TNT 제거와 온건파의 도주>


이 날, 전교사 교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와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배승일 씨는 이 날의 공로로 훈장을 받게 되지만 훗날 박탈당했다.


그러나 소송을 통해 훈장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온건파가 아래와 같이 주장하며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



그러나 강경파인 윤상원과 박남선 등이 최후 항전을 주장하였고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였으며 온건파는 전남도청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각지에 배치되었고


전남도청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홍보부 소속 박영순, 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며 시민군에게 전남도청으로 와 시민군에 합류하는 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계엄군은 새벽에 전남도청을 기습 공격하여 저항하는 시민군과의 교전을 벌였으나 쏜살같이 진압에 완료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작전을 종료한다.


이 날,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82년 12월, 석방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부활하고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성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에 여론은 들끓어 올랐고


때마침 발생한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화제가 되자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수감하여 처벌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깊게 관여한 것이 인정되어



징역 7년형에 처해졌으나 역시 사면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의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1. 1997년 서울지방검찰청, 군 검찰부 5.18 수사보고서

2.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수사보고서


이 글은 수사보고서의 원문을 근거로 하였으나 가독성을 위하여

계엄군의 배치도와 각 날짜마다의 사망자 명단을 요약하였음



"정치성향을 배제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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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 있는데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내란세력과 저항세력을 모두 함의하는 기계적인 중립 명칭이다. 

용어의 시작은 민주정의당이다. 

1988년 6월 21일에 5.18의 명칭으로 논란이 있을 때 민정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주장했다. 

이 명칭은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에게 격렬한 반대를 받았고 오후 늦게까지 절충을 계속 겪을 정도였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1일 기사 

사흘 뒤에 통일민주당은 결국 민정당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평화민주당은 여전히 반대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급기야 평민당에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쓰는 행위를 "배신행위"라고까지 했다.

 이 단어가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느낄 수 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평민당은 27일이 돼서야 이 명칭을 받아들였다. 

1988년 6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5.18 단체에선 상당히 긴 시간동안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를 썼다. 일부에선 이걸 진보용어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사실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는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세력한테도 받아들여졌던 단어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동아일보같은 보수주의 언론이 그대로 썼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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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노무현 정부부터였다. 

이것 때문인지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는 민중항쟁이 진보명칭인 것처럼 오해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진보나 좌파에서만 통용됐던 편향단어는 민주화운동도 아니고, 민중항쟁이란 단어도 아닌 광주혁명, 광주민중혁명이란 명칭인데 너무나 극단적이고 편향된 명칭이라 학계에서 씹혔다. 김영택 박사나 최정운 박사에 따르면 5.18은 민중혁명같은 게 아니며 오히려 시민군이 그런 걸 거부했다고 한다.

→ 학술 쪽으로 깊이 파고 싶다면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을 참고할 것.



유사역사학세력을 중심으로 '폭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나, 학술적으로 보나 일반 인식에 비춰보나 올바르지 않은 명칭이다. 자세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왜곡 참고.



해외에서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대로'Gwangju Uprising(광주 봉기)라 부르거나 Gwangju Massacre(광주 대학살)라고 칭한다. 드물게 Gwangju revolt 혹은 Gwangju rebellion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보기 힘들다. Uprising이 반란 및 폭동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한때 이 명칭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정작 해외에서는 uprising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을 나타낼때' 항상 쓰는 단어임이 알려진 후엔 그런 움직임도 사그라들었다.


아트빡스 구경하다가 찍은 사진을 올려보게 되었다.


얼마전에 본 영화가 생각나서 안되겠다.. 그래서 아트박스에 앉아서 폭풍 검색 중.


포스팅해서 모르던 역적사실을 좀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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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우리는 광주를 지키고야 말 것입니다.

1980년 5월 27일, 가두방송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사건
쿠데타와 군사독재에 피로써 맞선 무장투쟁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크게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좁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대한민국의 독재 군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기도 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어지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건 당시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일부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군부에게 유린당했다는 것에서 따와 광주사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 결국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써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재부상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부에게서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 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 수위가 상승,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작전에 참가한 계엄군들이 가졌던 "빨갱이에게서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등 다양한 정신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된 것이다.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했던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1차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이 범한 중죄를 어물쩡 넘어가려는 짓이 절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것으로 말단 계엄군의 행위가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은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 아니라 최규하였고, 

전두환이 발포를 지시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회의 특성과 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사실상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이기에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전두환에 있다는 것과 사실상 전두환이 지시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정황증거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두환이 지시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학살 항목을 들어가 보면 나오는 사례들 중에는 수하도 없는 사살이야 우발적이라고 쳐도, 이 "계엄군" 은 시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심지어는 물놀이하던 어린아이까지 무차별로 두들겨 패고, 단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총질을 해 댄 것은 물론, 부상 입은 시민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 심지어 공격 헬기를 동원한 무차별 사격 등등 그야말로 단순 "명령대로만 따랐다" 라고 볼 수준을 한참 전에 넘어선, 아인자츠그루펜과 다를 바 없는 추악한 범죄 행위들을 수두룩하기 저질렀기 때문에 전두환이나 말단 계엄군 쫄병들이나 모두 똑같은 공범인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계엄군도 전두환과 하나회에 의한 5.18의 피해자" 로 보는 시선에는 "나치 SS같이 신나게 죽여댄 놈들이 이제와서 피해자 좋아하네" 라며 노골적으로 조소하는 의견도 있는 편이다. 

이들이 저지른 짓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건만 이런 범죄자들이 28명씩이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고, 또 이런 놈들을 추모하는 작자들이 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 




"광주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인 줄만 알고 그랬다" 는 일부 계엄군 출신자들의 변명도 이들이 저지른 만행을 찬찬히 읽어 보면 전혀 통하지 않는게, 그렇다면 진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런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저 논리대로라면, 포로로 잡은 북한군이나 북한 지역 주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니까" 보이는 대로 무차별로 쏴 죽여도 문제 없는 존재들이기에 광주 사람들도 그런 "그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문제 없는 공산주의자들" 로 봤다는 건데, 이건 그야말로 전쟁범죄자들이나 할 법한 사상이다. 

어떻게 보면 이 계엄군들이 태어날 때부터 영화나 만화 등으로 늘상 보고 들으면서 자랐을, 세뇌에 가깝게 주입된 반공 프로파간다가 어디까지 사람을 망가뜨리는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NLPDR과 민중민주주의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최규하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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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The Living Tombstone - September이라는 곡과 

Green Day - Whatsername 리메이크 버전과 

화려한휴가를 요약한것이다


1. 한겨레신문 - 광주항쟁: 비극 속의 역사성 (1988.5.17 ~ 5.26 연재)


2. 경향신문 - 실록 민주화운동 (2004.1.18 ~ 2.1 연재분)


2. 관련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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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는 몇 명인가?

사망자는 몇 명인가?

5.18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 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당목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로 알려진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여사의 증언. 

<이야기 여성사: 한국 여성의 역사 1권>.

- '조아라: 나는 아직도 광주가 생생합니다 

-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 p209~210.





5월 31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합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127명의 민간인, 109명의 군인, 144명의 경찰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믿는 광주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너무 많이 죽어나가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훗날, 5.18 기간 중

오랫동안 집을 떠난 뒤로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만 2천여 명에 달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5.18 당시 사망자 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공수부대원들이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나오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시켰기 때문이다.



자 2천 명 중 사망자가 2명이었으며, 

당시 국군에서 일한 친구가

5.18 희생자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들은 것을 근거로 해 

사망자는 무려 8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점차 늘어났다. 

문제는 사망자 수가 아닌 학살 자체를 가벼이 보는 신군부의 태도이다.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광주사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애미 폭동' 수준이다."

라고 밝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政治人(정치인) 學生利用(학생이용)없어야

동아일보 | 1980.07.25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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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浩 (1804 ~ 1866)

조선 말기의 지도 제작자이자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음.





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오늘날 현존하는 자료는 많지 않다. 

또한 그의 태생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잔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실학을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그는 최한기와도 교류하였으므로 김정호는 최한기가 편찬한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맡았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편찬한 청구도의 서문을 써주었다. 

그외에 김정호를 후원한 인물로는 김정호도 참여한 여도비지를 편찬한 최성환, 대동여방도 서문을 썼으며 김정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한 신헌 등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성부 종로 쪽에 살았던 듯하다. 

종로학원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석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김정호가 이쯤 살았던 것 같다고 시사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성동구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그의 호를 딴 고산자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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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전에 편찬한 지도, 

청구도와 동여도 그리고 이전의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해서 

근대 이전에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편찬했다. 

보통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호 자신이 전 국토를 유람하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로 그가 그러한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한반도를 세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은 지도가 흥선대원군 때문에 사라졌다고 당당히 사기를 쳤던 최남선의 글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던 김정호가 전 국토를 답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듯하다. 

그러나 필요한 지역만 답사했을 가능성은 있다.



>>"팔역의 산천을 샅사이 답사함을 사양치 아니하였으며... 백두산만을 닐곱 번 올나갓으며 이를 위하여 수십 년 과객질을 하얏다" -고산자를 회함-, "그동안,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조선어독본-

>>다만 객관적으로 김정호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들은 모두 김정호가 실측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3가지인데, 청구도에 대한 서문인 최한기의 '청구도 제'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 하였다",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에는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를 등을 참고"하였고,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도 직접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전국을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의 이노 타다타카를 모델로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에도 근방의 상인출신이었던 이노 타다타카는 수차례 실측여행을 떠났고, 남쪽의 큐슈부터 북쪽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측량하여 일본 최초의 실측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도>를 편찬하였다고.


.사실 지도 안에 담긴 정보는 너무나 상세하기 때문에 직접 그 정보를 전부 스스로 모아서 지도에 담을 수는 없다. 대동여지도 실물의 크기는 높이 7미터에 가로 3미터 반인 만큼 거대하다. 더불어 여러 판으로 나뉘어 있고 이 여러 판들을 펼쳐 놓아야 비로소 거대한 지도가 완성된다. 때문에 지도 전체를 전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직접 보고싶으면 수원에 있는 국토지리정보원 구내 지도박물관을 방문해 보라. 대동여지도 전체를 박물관 바닥에 전시해 놓고 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는 10리마다 표시를 해 두어서 실용적인 목적을 꾀하였고, 더 나아가 여러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삽입하는 등,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조선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알 수 있는 훌륭한 정보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10리는 직선거리 10리가 아니라 실제 거리 10리이다. 산이 험할수록 촘촘하게 찍혀있다. 또한 김정호는 "대동지지"라는 지리지도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도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11매가 보관 전시되어 있다.[5] 이 중앙박물관 목판은 초창기 해당목판에 잘못된 기록을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호가 직접 만든 초판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더 많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만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 외에도 많은 지도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도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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