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적 여론이 

상당히 동정적, 호의적이다보니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아버지 인조가 악역으로 자주 나오는 데 반해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 역을 많이 한다.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선역으로 잘 나오는 편. 

능력과 기대감은 있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인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2010년 3월에는 김인숙 작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소현>을 발표했다. 

작품 속 소현세자가 비록 대단히 능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묘사나 고증은 괜찮은 편.




만화가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대부의 바다에 고립된 광해군을 생각하자"라고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그(사대부)들을 설득해가면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은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유자들 눈에는 문제점도 많았겠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격과 정치적 능력을 가졌던 세자' 라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만약'을 통한 평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당연히 학계에서 소현세자에 관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심양에서 벌인 외교, 

대외활동과 그의 죽음(사인, 병증, 장례절차)과 관련된 부분일 뿐이다. 



'만약' 소현세자가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했다면 

유교 교조주의에 찌든 조선에 나타난 기린아가 되었을지, 

박시백의 추정처럼 어느 정도 충격만 주고 결국은 흐지부지 평범한 왕이 되었을지,

사대부들과 대립하다가 반정으로 폐위되는 폭군이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일본에게 침탈당함으로써 

근대화가 실패한 우리나라 역사의 대한 보상 심리라고도 볼 수 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믿는 줄도 모른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그의 치세에 표착해 왔을 헨드릭 하멜 일행을 통해 

네덜란드와 수교하고 무역을 장려했을거라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드는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이 능력이 뛰어난 왕이었는데다가 

그 역시 외부 기술이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부당하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바뀐다는 보장은 없다. 


소현세자가 서양의 많은 문물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데 창구가 되었던

일종의 선배격이었던 청나라는 훗날 19세기 서양 열강의 이권밭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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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모두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 경선군 이석철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기 때문에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 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다.
  • 경완군 이석린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 경안군 이석견 : 제주도-강화도-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혼인을 한지 얼마 안 된 22세에 요절한다.
  • 경숙군주 :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다.
  • 경녕군주 :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 경순군주 : 소현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으나(55세), 19세에 남편이 사망하여 후손은 없다.
  •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첫번째, 두번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한 딸이 2명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출생과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왕이 된 효종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 끊어져 버린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4살짜리 아이가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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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의 사후...


    그가 사망한 후 

    인조는 후계자 교체와 그에 따른 정리작업에 돌입한다.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자는 죽었으나 

    뒷날 청이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데려가려 했던데서 드러나듯 

    소현세자의 자식들 역시 청의 계산 아래 있었다. 


    인조는 역시 청에 볼모로 가긴 했지만 차자라서 청의 주시를 받지 않았던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움직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차기 왕으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고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를 함으로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물론 이로한 조치는 후대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정통성 논쟁과 청의 지배하에 있는 군왕의 탄생중 

    인조가 어느쪽을 더 위험하게 여겼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효종-현종의 승계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녀를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둥 

    자신의 궁녀들을 때려죽이는 그녀가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대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들을 이용해 인조를 압박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지라 거절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현재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부대에서 정훈교육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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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 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지 3달도 못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런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해석은 알아서.)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고 


    지관들이 정한 장지더러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유일하게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독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묵던 곳에서 쓴 편지를 보면 

    세자는 원래 귀국 직전부터 몸이 안 좋았고,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완전히 한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단순한 의료사고였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는 소리. 

    또한 간이 안 좋아 사망한 경우에도 얼굴이 검게 물들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또 최근 세자 일기가 번역 되면서 

    독살설 보다는 처방을 잘못해서 죽었다라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좋던 사람이 실력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 야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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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병란 후, 포로 시기의 소현세자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있지 않고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에 대한걸 따져 묻곤 했었는데,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횡의 사건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청이 세자를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구절에 "유고시 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아들이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린게 주요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사림이나 조정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게 세자 광해군이 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원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한다면 

    청에 의중에 따라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왕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건 곧 원간섭기의 재림이다.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 시킨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의 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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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란 이전의 소현세자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반정이 성공함으로서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큰 아들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조반정의 명분은 백성들이 보기에 매우 부족했고 이때문에 세자의 책봉이 미뤄질 정도로 민심이 어지러웠다고 한다.



    그후 불과 2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막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인조는 

    자신은 강화도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조정의 일부)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전란이 끝난 그 해 말 강석기의 둘째 딸과 가례를 올리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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