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의 야사와 평가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19]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에 인두를 대어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수되는 모습이 나왔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신정일 지음, 다시쓰는 택리지 1권 166페이지)



용비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그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질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다 나온 것을 
아들에게 준 명검인 전어도(傳御刀)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박살난 전어도와 금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진 왕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유능했던 군주라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기의 막장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경순왕이나 순종(조선)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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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과 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인조 때 명청 관계와 거꾸로 원을 공격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려의 복종을 확인 목적으로) 

공물(심지어 공녀!)을 뜯어낸 것이 

명이었던 지라 조정의 반발과 골치꺼리가 되었고, 

뒤의 철령위와 함께 친명에서 거리를 두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3월,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이라며 강짜를 놓았다. 

이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 

또한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때도 창왕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할 때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라며 청했고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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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이인임 일파의 숙청 



그러나 조금 성장하고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과 임견미 등은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최영은 이를 탄식할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1388년 1월의 일. 하지만 4년 후 고려는 멸망하는데...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때 맞이한 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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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막장군주



결국 국왕은 정치에의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치세.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하고 

민가에서 아예 말 달리며 사냥을 했을 정도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이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을 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자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선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기 큰아버지 같은짓을...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고려사 우왕 열전)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후대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 어머니뻘이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때의 나이는 겨우 10여세였다.






이렇듯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고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집단화 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지방까지 학살과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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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

(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이 즉위할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명덕태후부터 공민왕이 암살된 위급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종친을 추대하려고 했고, 

훗날 이성계 일파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할때도 

우왕은 적어도 최영도 인정할만큼 실정을 벌였으니 

의종처럼 그냥 폐위하면 될일이였는데 

궂이 후술할 폐가입진이라는 잘못하면 

무리수에 가까운 명분을 가져다 쓴 것도

당시 고려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등 조선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단 우왕신씨설의 주요 근거는 

고려사와 태조 기록에서는 

우가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조선시대 


즉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임으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 시킨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고. 

따라서 크게 자기 조상들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 인용> 

그리고 고려사 우왕편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 자체는 없었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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