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왕후

2.홍국영과의 갈등


늘 각별히 정조를 내조하였으나 

정조가 총애한 신하인 홍국영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이가 원빈 홍씨였다.

후궁을 들이기 직전인 1778년(정조 2년),

박재원이 효의왕후의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 양의를 들일 것을 건의했다. 

홍국영은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국영은 그의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있었지만,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를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정조는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효의왕후를 모함한 홍국영을 귀양보냈다. 




원빈 홍씨의 입궐 과정을 

그린《숙창궁입궐일기》에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의 인사 받기를 며칠이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효의왕후와 홍국영의 갈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후에는 대체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효심이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시할아버지인 영조는 

물론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영조 역시 손자며느리인 효의왕후를 총애했다. 


뿐만 아니라 시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텼으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수라상을 올릴 때는

자신이 직접 반찬의 맛을 보고 올렸다고 한다. 

또한 검소한 걸로도 유명했다. 

수진궁이나 어의궁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으면 

친정에 보내는 왕비도 많았는데, 

효의왕후는 이 재물을 공물로 생각하고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불임인 것만 빼면 완벽한 왕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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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대 왕비


孝懿王后

양력 : 1754년 1월 5일 ~ 1821년 4월 10일

음력 : 1753년 12월 13일 ~ 1821년 3월 9일


조선 정조의 왕비. 남편 내조도 잘하고 시가(媤家) 어른들에게 공손했으며 후궁들과도 사이가 좋았던 조선의 천사표 왕비.



생애

1753년에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남양 홍씨의 딸로 태어났다. 

10살이 되던 1762년(영조38년)에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1살 연상의 왕세손 이산과 혼인했다. 

그러나 혼인한 직후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때 그녀는 왕세손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가 정조의 배필이 된 것은 

그녀의 본관인 청풍 김씨 출신이며 시할아버지인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아버지인 숙종을 낳았듯이, 

그녀도 정조의 아내로서 적법한 후손을 낳아주길 바라는 영조의 뜻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1776년 남편인 정조가 즉위하자 세손빈에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자신의 도리를 잘 해내 칭송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후사를 낳지 못해서

1790년에 수빈 박씨(壽嬪朴氏)가 정조의 아들 순조를 낳자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키웠다.

양자인 순조를 잘 키웠으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나 또다른 후궁 화빈윤씨와도 자매처럼 잘 지냈다 한다.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를 받으며 지내다 1821년 창경궁 자경전에서 숨졌다.

향년 69세. 사후에 '예경자수'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시호를 효의(孝懿)로 정하였다.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하고 있다.

1899년 고종 황제가 정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효의왕후 역시 효의선황후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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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 1536년 12월 26일 (음력) ~ 1584년 1월 16일 (음력)



화담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과

퇴계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에 의해 

크게 떠받들어졌으며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흔히 이기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즉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까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분속설(理氣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 ] 




그런데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덕분에 이황과 더불어 전국의 윤리를 택한 문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탄의 대상(…).



[주기론]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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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진사과(소과) 초시→생원과/진사과 복시→문과(대과) 초시→문과 복시→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시험인 별시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 2,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생원과 초시 : 29세 

생원과 복시 : 29세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하고 합격) 

대과 초시 : 29세 

대과 복시 : 29세 

대과 전시 : 29세

별시 초시 :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4세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한 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는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한 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선비들 사이에 오갈 정도로 책을 읽는 것은 어려웠다. 


2000년대 초반 한국으로 치자면, 

영어 전문 서적을 독해할 때, 

수십줄을 동시에 읽고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옛 고서를 보면 줄(계선)이 쳐 있는데 이를 행(行)이라고 한다. 

한 줄에 20자가 들어가면 10행 20자라고 표현하는데 

이걸 한 번에 읽었다는 뜻이 된다. 


못해도 200자의 한자를 한꺼번에 읽었다는 뜻. 

게다가 필사본이라면 

일반적인 목판본/활자본에 비해서 

작고 빽빽하게 적혀 있는데다 초서로 적혀 있어 

더 많은 한자를 읽었던 것 뿐만 아니라 

그 글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학습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뛰어난 사상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십만양병설의 진위 문제와 함께 서인의 거두로서 이이의 신격화 작업의 일부였다는 점을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러번 과거를 응시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 많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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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 이이 생애와 사망


1536년 12월 26일 (음력) ~ 1584년 1월 16일 (음력)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본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자랐으며, 

1548년에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아명은 현룡, 혹은 견룡. 어린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그가 22세 때 성주목사의 딸인 부인 노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절에서 머리를 삭발하고 수양했던 적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삭발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전해진다. 


그러나 우연히 유교서적을 다시 읽은 그는 곧 하산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받아 마땅한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다. 


심지어는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었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출신이었던 이이에 대한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그가 29세 때는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호조 정랑으로 등용된 이래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 좌랑, 그 뒤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14대 왕 선조 재위 1년에 명나라 가는 사신으로서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1581년에 그는 장차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을 예지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9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에서 운명(殞命)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법원읍 자운서원에 있으며, 

이이와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부인 노씨가 한 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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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이(李耳) 

출생 1536년 12월 26일(음력) 

사망 1584년 1월 16일(음력) 

출생지 강원도 강릉(고향은 경기도 파주) 

사망지 한성(現 서울특별시) 

분야 정치, 교육 

가족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사임당 신씨, 부인 노씨


李珥 1536년 12월 26일 (음력) ~ 1584년 1월 16일 (음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중기 예술가로 유명한 신사임당과 

그 아내의 명성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이원수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본명은 이이(李珥), 호는 율곡(栗谷).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다.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이 모자는 한국 최초의 모자 지폐 인물이 되었다


반면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남긴 기록 중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그 형제들은 아버지와 상당히 자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썩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그 신사임당이 워낙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그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질투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


붕당정치에서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물론 생전에 그의 정책은 한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그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이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조선의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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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알아보자_2


임진왜란의 명칭


한자

壬辰倭亂 


영어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호타이코의 조선정벌)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흔히 임진년에 일어난 

왜구의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 기간은 2년에서 2년 반 남짓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나눠 부를 때도 있는데, 


전쟁 발발 1년만에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박살내며 

재침을 시작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크게 보면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일부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유재란까지 같이 다룬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 역(文禄の役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닛뽄반자이틱하게는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옛날부터 쓰이는 표현으로는 

히데요시가 '중국(唐)'에 '들어가려는(入る)' 시도였다고 해서 

카라이리(唐入り)라고도 한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이고, 


중간에 후시미 대지진 등 자연재해 때문에 악운을 떨쳐내는 의미에서 


한 차례 연호를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




중국에서는 정식으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하고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는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여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신종 만력제 당시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

(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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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알아보자_1


임진왜란의 개요


한자

壬辰倭亂 


영어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호타이코의 조선정벌)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 음력 4월 14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무술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과 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


흔히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경계로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며,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론 중국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 삼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합병' 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수백년 만에 통일국가가 된 최초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인 패권국가였지만 

슬슬 몰락해가던 명, 그리고 그 휘하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조선이 추락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상승세에 있던 일본의 대비를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실제로 전국통일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국인들, 

그리고 특히 조선인들은 '일본은 무시못할 나라'라는 공포감과 존재감을 얻었다.

또한, 도자기 기술 약탈 등 문화적 성과 역시 있었다.



전화를 고스란히 당한 조선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급부상한 청나라의 침공,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북방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의 지배로부터 떨어져나갔으며 

특히 명은 이자성의 내란과 북방의 여진족으로 나라가 망했다. 


반면 일본은 패전을 하긴 했지만 

전란이 끝나고 그로 인한 피해는 경제 활성화 등에 따라 

거진 순식간에 복구하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겐로쿠 시대 등의 전성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혹은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일한 사건만이 중대하게 작용하여 일어났다는 해석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타국에는 상대적으로 과장하여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일본 중심 사관이 뿌리뽑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1,2년도 채 안되어 붕괴되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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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적 여론이 

상당히 동정적, 호의적이다보니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아버지 인조가 악역으로 자주 나오는 데 반해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 역을 많이 한다.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선역으로 잘 나오는 편. 

능력과 기대감은 있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인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2010년 3월에는 김인숙 작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소현>을 발표했다. 

작품 속 소현세자가 비록 대단히 능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묘사나 고증은 괜찮은 편.




만화가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대부의 바다에 고립된 광해군을 생각하자"라고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그(사대부)들을 설득해가면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은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유자들 눈에는 문제점도 많았겠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격과 정치적 능력을 가졌던 세자' 라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만약'을 통한 평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당연히 학계에서 소현세자에 관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심양에서 벌인 외교, 

대외활동과 그의 죽음(사인, 병증, 장례절차)과 관련된 부분일 뿐이다. 



'만약' 소현세자가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했다면 

유교 교조주의에 찌든 조선에 나타난 기린아가 되었을지, 

박시백의 추정처럼 어느 정도 충격만 주고 결국은 흐지부지 평범한 왕이 되었을지,

사대부들과 대립하다가 반정으로 폐위되는 폭군이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일본에게 침탈당함으로써 

근대화가 실패한 우리나라 역사의 대한 보상 심리라고도 볼 수 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믿는 줄도 모른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그의 치세에 표착해 왔을 헨드릭 하멜 일행을 통해 

네덜란드와 수교하고 무역을 장려했을거라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드는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이 능력이 뛰어난 왕이었는데다가 

그 역시 외부 기술이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부당하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바뀐다는 보장은 없다. 


소현세자가 서양의 많은 문물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데 창구가 되었던

일종의 선배격이었던 청나라는 훗날 19세기 서양 열강의 이권밭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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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모두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 경선군 이석철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기 때문에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 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다.
  • 경완군 이석린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 경안군 이석견 : 제주도-강화도-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혼인을 한지 얼마 안 된 22세에 요절한다.
  • 경숙군주 :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다.
  • 경녕군주 :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 경순군주 : 소현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으나(55세), 19세에 남편이 사망하여 후손은 없다.
  •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첫번째, 두번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한 딸이 2명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출생과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왕이 된 효종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 끊어져 버린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4살짜리 아이가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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