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의 사후...


그가 사망한 후 

인조는 후계자 교체와 그에 따른 정리작업에 돌입한다.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자는 죽었으나 

뒷날 청이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데려가려 했던데서 드러나듯 

소현세자의 자식들 역시 청의 계산 아래 있었다. 


인조는 역시 청에 볼모로 가긴 했지만 차자라서 청의 주시를 받지 않았던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움직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차기 왕으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고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를 함으로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물론 이로한 조치는 후대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정통성 논쟁과 청의 지배하에 있는 군왕의 탄생중 

인조가 어느쪽을 더 위험하게 여겼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효종-현종의 승계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녀를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둥 

자신의 궁녀들을 때려죽이는 그녀가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대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들을 이용해 인조를 압박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지라 거절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현재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부대에서 정훈교육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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