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막장군주



결국 국왕은 정치에의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치세.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하고 

민가에서 아예 말 달리며 사냥을 했을 정도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이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을 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자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선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기 큰아버지 같은짓을...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고려사 우왕 열전)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후대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 어머니뻘이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때의 나이는 겨우 10여세였다.






이렇듯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고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집단화 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지방까지 학살과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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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

(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이 즉위할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명덕태후부터 공민왕이 암살된 위급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종친을 추대하려고 했고, 

훗날 이성계 일파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할때도 

우왕은 적어도 최영도 인정할만큼 실정을 벌였으니 

의종처럼 그냥 폐위하면 될일이였는데 

궂이 후술할 폐가입진이라는 잘못하면 

무리수에 가까운 명분을 가져다 쓴 것도

당시 고려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등 조선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단 우왕신씨설의 주요 근거는 

고려사와 태조 기록에서는 

우가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조선시대 


즉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임으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 시킨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고. 

따라서 크게 자기 조상들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 인용> 

그리고 고려사 우왕편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 자체는 없었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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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의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



반야가 우를 낳은 이후에 

신돈의 집에서 살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1371년에 7세에 궁에 들어갔으며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가 

단 하나뿐인 왕자의 어머니라고 할 경우 

혈통에 의혹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후궁인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되었다. 

1373년(공민왕 22년)에는 우(禑)라는 정식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부왕 공민왕이 끔살당하자 

이인임 등의 비호를 받아 10세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왕 수업에 힘썼고 

왕실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던 

할머니 명덕태후의 훈계를 명심하여 

좋은 왕이 되리라 노력하는 듯 보였다. 

총명하고 의욕이 강했던 우왕은 

어머니인 반야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후로도 평정을 유지하였으나,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권신 중 

이인임과 반목하던 지윤,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자 했다. 

최영의 군권을 이용해 이인임 일당을 숙청하고 친정을 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노회한 이인임은 궁궐 내 정보망을 통해 이를 포착한 뒤 지윤을 숙청했으며 

국왕의 최영 포섭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우왕은 

유모 장씨 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 나이 어린 국왕이 이인임을 대신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이인임과 대립하던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과 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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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공민왕 스스로 신돈에게 상납받은 

여종인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주장한 아들이다. 


하지만 이 신돈에게 상납받기 전 

신돈이 먼저 반야와 관계하였고,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소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와 

조선 개국의 주역인 이성계등은 

폐가입진의 명분을 얻기위해 다음과 같은 우창비왕설을 주장했고, 

이는 조선개국의 정당성을 얻는 사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기 <고려사>와 <동국통감> 등을 편찬한 

조선의 사관들마저 우왕을 그저 "반역조(반역자)" 항목에 '신우(辛禑)'라고 기록한 것 역시,

태조 이성계의 손에 의해 요절한 우왕과 창왕이 정당한 왕이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왕씨가 아니라고 음해당하여 강제로 폐위당했고, 

복위마저 물건너갔기 떄문에 물론 시호마저도 받지 못했다.


우왕이라고 불리우는 건 그냥 이름이 '우'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왕건의 후손이면 

왕우 조선의 연산군과 광해군도 

최소한 왕이었던 적이 있다는 건 인정하고, 

군호로써 불러주는 것에 비하면, 

죽어서도 굴욕적인 대우다. 

이 점은 창왕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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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의명(依明)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



인조는 16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왕 광해군의 명청(明淸) 평행의 중립외교를 파기하고 


확고한 의명 및 친명배청 정책을 고수하며 편향적 외교를 추구해왔다. 


또 명나라를 은국(恩國, 은혜로운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받들며 


조명(朝明)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반면 


청(淸)에는 명(明)을 위협하고 멸망시킬 

도덕도 예의도 없는 패륜의 나라이자 

오랑캐들의 나라라고 비방하며 

청을 배척하는 외교책을 폈다. 


또한 명(明)이 청(淸)으로부터 위기에 처하면 형제국으로서 도울 것이라고 표방하고 

명과의 맹방(盟邦) 관계를 과시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수준으로 갔다.


또 전왕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폭군의 잔재가 담겨있는 정책이라며 과감히 파기하고 

상국과 오랑캐 따위와 평행을 간다는 것이 치욕적이라 생각하며 

상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여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도 하였다. 


광해군의 양면외교를 크게 비틀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만 

강홍립의 가족들을 처형한 것이나 국교단절 등을 한 것과 

공개적으로 친명배금을 표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오랑캐의 기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현세자가 가져온 서양의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등 

서양의 기술도 철저히 배척했다.


인조의 이러한 친명 및 의명 정책은 

명을 적대시하였던 청에게 자극을 주었으며, 

청은 이러한 조선을 자신들의 체제를 모독하고 

적국에게 굴욕하듯 개 노릇을 하는 망발을 한다고 하여서 

응징으로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북방군이 아작난 틈에 

이괄의 잔당들의 설득에 움직인 홍타이지는 

마침내 준비 끝에 조선을 침략해 

1차적으로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정묘호란에서 얻은 이득으로 

대규모의 군세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인조는 이 두 호란에 파탄을 부른 임금으로 낙인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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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해석


누가 어떤 복장을 입건 신경 쓰지 않는 현대에서는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때 인조가 청나라 복장을 받아 입었다는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그 까닭은 옛날 사대교린 관계에서 의복의 제도는 천자가 결정하여 


제후와 신하, 백성들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신분의 고하귀천에 따라 


의식주의 제도를 모두 법도로 정했으며, 


이는 천자가 지배자로서 


신민의 사생활조차도 간섭하고 통솔할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관복을 내려주는 것은 다른 나라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집어넣었다는 증명이다.



즉, 명나라의 의복 제도를 따르던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가 내려준 의복을 입었다는 것은 


조선이 명의 영향권을 벗어나 


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정치 퍼포먼스였다. 


중국의 변발이나 구한말의 단발령의 반발이 강력했던 것도 


당시에는 머리 모양도 이렇게 엄격한 의복 복제의 일부로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조는 곤룡포가 아닌 평민의 복장인 남염의(藍染衣)를 입었다.


죄인이라 용포를 입을 수 없다는 용골대의 의견과 용포는


명나라에서 하사한 의복이기 때문에 더더욱 입을 수 없었다.


항복 예가 끝나고 명나라에서 내려온 고명과 의복 장구류는 죄다 반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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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 형식은 아래와 같다. '상(上)'은 인조를 의미한다.

용골대(타타라 잉굴다이)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이를 보면 청나라 복장을 입고 절한 건 아니고, 뒤에 청의 복장을 받아 입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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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지맹(城下之盟) 


적군이 성벽 아래까지 쇄도해 온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굴욕적 맹약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한양에 침입해 오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게 대항하였으나,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끝내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사건. 


실록의 기록(효종, 현종 등)을 보면,

정축년에 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 했다. 

치욕의 역사인 만큼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한 편.


경술국치 이전까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었던 

국치(國恥) 중의 하나였다. 

인조의 지나친 편향외교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성향, 

그리고 지나친 의명(依明, 명에 의지하는 것) 성향이 

불러왔던 오판의 산물이기도 하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1세기에 이런 치욕적인 역사를 보자니 

단단히 빡친 시민이 페인트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고 

원래 있었던 위치라는 롯데월드 근처로 돌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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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2대 왕 혜종 왕무



무덤과 피휘, 불천지주의 위세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년의 모습으로 봉분도 깎여버렸고 

석물까지 많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고종 때 거란이 개경 인근까지 침입했는데 

이 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재위 내내 불안한 왕위를 누렸고 

묘호도 썩 좋지 않은 '혜'를 받은 혜종이지만, 

사후 왕위 계승이 몇번 더 격변을 거치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된다. 


바로 정종, 광종과 성종의 후계가 모두 끊기면서 

왕위가 현종으로 넘어간 것. 


이후 고려 왕계는 현종의 후손들이 잇게 되는데, 

혜종은 태조의 맏이, 

즉 현종의 큰아버지 뻘로 취급되면서

무신정변까지는 혜종이 종묘의 불천지주에 있게 되었다. 


조선으로 치면, 현종이 세종대왕이라면 혜종은 태종의 위치에 있게 된 셈. 


혜종 오오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 대종의 문제로 덕종 사후 정종(靖宗) 때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 직계보는 고려 문종, 고려 숙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혜종의 휘인 무(武) 역시 고려 내내 피휘 되어, 

모든 무라는 글자는 범 호(虎)로 대체되게 되었다.

민폐왕 즉, 고려시대에 무신은 호신이라고 불렀다. 

호신정변, 호신정권 이런 면에서 혜종은 그 재위는 안습했으나 

훗날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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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2대 왕 혜종 왕무 사망원인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憸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두해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왕의 침실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려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앞서 피해있었는데, 

목표를 상실하여 당황해하던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은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혀하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은 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채 묻어 두었는데, 

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시해당할 뻔 했는데

이를 그냥 넘기는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즉, 조사를 시작하면 시해를 노렸던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이를 알고 있던 혜종은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국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두번에 걸쳐 행해지자, 

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는데,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 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전 집안이 몰살되는 끔찍한 일은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 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약하였고, 

선해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공신이자 외척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다툼을 외면하고 방치한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두번에 걸쳐 암살될 번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죽음을 암살로 여기기고 한다.


사후 왕위는 이복아우 정종과 광종에게 각각 돌아갔다. 

그의 아들 흥화군은 광종 연간에 죽었고 딸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후손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군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는 관계로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고려 혜종 왕무


고려 2대 혜종 왕무 사망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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