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의 사후...


그가 사망한 후 

인조는 후계자 교체와 그에 따른 정리작업에 돌입한다.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자는 죽었으나 

뒷날 청이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데려가려 했던데서 드러나듯 

소현세자의 자식들 역시 청의 계산 아래 있었다. 


인조는 역시 청에 볼모로 가긴 했지만 차자라서 청의 주시를 받지 않았던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움직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차기 왕으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고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를 함으로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물론 이로한 조치는 후대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정통성 논쟁과 청의 지배하에 있는 군왕의 탄생중 

인조가 어느쪽을 더 위험하게 여겼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효종-현종의 승계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녀를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둥 

자신의 궁녀들을 때려죽이는 그녀가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대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들을 이용해 인조를 압박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지라 거절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현재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부대에서 정훈교육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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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 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지 3달도 못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런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해석은 알아서.)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고 


지관들이 정한 장지더러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유일하게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독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묵던 곳에서 쓴 편지를 보면 

세자는 원래 귀국 직전부터 몸이 안 좋았고,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완전히 한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단순한 의료사고였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는 소리. 

또한 간이 안 좋아 사망한 경우에도 얼굴이 검게 물들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또 최근 세자 일기가 번역 되면서 

독살설 보다는 처방을 잘못해서 죽었다라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좋던 사람이 실력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 야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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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병란 후, 포로 시기의 소현세자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있지 않고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에 대한걸 따져 묻곤 했었는데,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횡의 사건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청이 세자를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구절에 "유고시 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아들이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린게 주요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사림이나 조정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게 세자 광해군이 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원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한다면 

청에 의중에 따라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왕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건 곧 원간섭기의 재림이다.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 시킨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의 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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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란 이전의 소현세자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반정이 성공함으로서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큰 아들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조반정의 명분은 백성들이 보기에 매우 부족했고 이때문에 세자의 책봉이 미뤄질 정도로 민심이 어지러웠다고 한다.



그후 불과 2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막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인조는 

자신은 강화도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조정의 일부)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전란이 끝난 그 해 말 강석기의 둘째 딸과 가례를 올리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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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과 언론의 영향력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필화사건
  •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이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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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의 발언에서 

따온 말로 보인다. 




- "자유의 나무는 매순간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로 새로워진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켜, 

최종적으로는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제1공화국을 종식시킨 위대한 민주주의 시민 혁명.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에서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혁명이다.


사상자 사망 185명 부상 1,500여명




배경 :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이 하위 항목의 서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학술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서적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때는 저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린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

그때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왔던 것이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어가며 잿더미가 되어 전세계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게 바로 이때였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숭고하고도 고결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시대에 반독재 민주시위가 가능했던 것인가?


1950년대에 민주주의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정착하는 것이 성공한 데에는 몇 가지 꼭 알아야 할 필연적인 사회적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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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의 야사와 평가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19]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에 인두를 대어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수되는 모습이 나왔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신정일 지음, 다시쓰는 택리지 1권 166페이지)



용비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그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질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다 나온 것을 
아들에게 준 명검인 전어도(傳御刀)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박살난 전어도와 금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진 왕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유능했던 군주라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기의 막장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경순왕이나 순종(조선)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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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폐위 그리고 비참했던 최후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음에도

출전했던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요게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개경을 포위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도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집에 없고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터라 ...망했다...

우왕 14년(1388)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ㅡ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 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 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왕의 무리수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


결국 이 때문에 분노한 이성계 일파한테 폐위된 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사돈의 형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으나,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조민수의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으나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창왕도 폐위되었고

결국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내세운 폐가입진론에 의해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향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 《고려사》 공양왕 원년

무덤 기록이 없고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내려오는 무덤이 있긴 하다.


이때 우왕의 아내 영빈최씨도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시체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체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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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과 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인조 때 명청 관계와 거꾸로 원을 공격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려의 복종을 확인 목적으로) 

공물(심지어 공녀!)을 뜯어낸 것이 

명이었던 지라 조정의 반발과 골치꺼리가 되었고, 

뒤의 철령위와 함께 친명에서 거리를 두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3월,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이라며 강짜를 놓았다. 

이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 

또한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때도 창왕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할 때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라며 청했고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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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이인임 일파의 숙청 



그러나 조금 성장하고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과 임견미 등은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최영은 이를 탄식할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1388년 1월의 일. 하지만 4년 후 고려는 멸망하는데...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때 맞이한 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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