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알아보자_2


임진왜란의 명칭


한자

壬辰倭亂 


영어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호타이코의 조선정벌)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흔히 임진년에 일어난 

왜구의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 기간은 2년에서 2년 반 남짓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나눠 부를 때도 있는데, 


전쟁 발발 1년만에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박살내며 

재침을 시작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크게 보면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일부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유재란까지 같이 다룬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 역(文禄の役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닛뽄반자이틱하게는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옛날부터 쓰이는 표현으로는 

히데요시가 '중국(唐)'에 '들어가려는(入る)' 시도였다고 해서 

카라이리(唐入り)라고도 한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이고, 


중간에 후시미 대지진 등 자연재해 때문에 악운을 떨쳐내는 의미에서 


한 차례 연호를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




중국에서는 정식으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하고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는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여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신종 만력제 당시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

(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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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알아보자_1


임진왜란의 개요


한자

壬辰倭亂 


영어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호타이코의 조선정벌)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 음력 4월 14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무술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과 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


흔히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경계로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며,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론 중국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 삼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합병' 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수백년 만에 통일국가가 된 최초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 전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인 패권국가였지만 

슬슬 몰락해가던 명, 그리고 그 휘하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조선이 추락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상승세에 있던 일본의 대비를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실제로 전국통일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국인들, 

그리고 특히 조선인들은 '일본은 무시못할 나라'라는 공포감과 존재감을 얻었다.

또한, 도자기 기술 약탈 등 문화적 성과 역시 있었다.



전화를 고스란히 당한 조선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급부상한 청나라의 침공,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북방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의 지배로부터 떨어져나갔으며 

특히 명은 이자성의 내란과 북방의 여진족으로 나라가 망했다. 


반면 일본은 패전을 하긴 했지만 

전란이 끝나고 그로 인한 피해는 경제 활성화 등에 따라 

거진 순식간에 복구하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겐로쿠 시대 등의 전성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혹은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일한 사건만이 중대하게 작용하여 일어났다는 해석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타국에는 상대적으로 과장하여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일본 중심 사관이 뿌리뽑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1,2년도 채 안되어 붕괴되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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