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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병란 후, 포로 시기의 소현세자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있지 않고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에 대한걸 따져 묻곤 했었는데,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횡의 사건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청이 세자를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구절에 "유고시 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아들이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린게 주요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사림이나 조정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게 세자 광해군이 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원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한다면 

청에 의중에 따라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왕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건 곧 원간섭기의 재림이다.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 시킨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의 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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