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의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



반야가 우를 낳은 이후에 

신돈의 집에서 살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1371년에 7세에 궁에 들어갔으며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가 

단 하나뿐인 왕자의 어머니라고 할 경우 

혈통에 의혹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후궁인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되었다. 

1373년(공민왕 22년)에는 우(禑)라는 정식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부왕 공민왕이 끔살당하자 

이인임 등의 비호를 받아 10세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왕 수업에 힘썼고 

왕실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던 

할머니 명덕태후의 훈계를 명심하여 

좋은 왕이 되리라 노력하는 듯 보였다. 

총명하고 의욕이 강했던 우왕은 

어머니인 반야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후로도 평정을 유지하였으나,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권신 중 

이인임과 반목하던 지윤,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자 했다. 

최영의 군권을 이용해 이인임 일당을 숙청하고 친정을 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노회한 이인임은 궁궐 내 정보망을 통해 이를 포착한 뒤 지윤을 숙청했으며 

국왕의 최영 포섭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우왕은 

유모 장씨 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 나이 어린 국왕이 이인임을 대신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이인임과 대립하던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과 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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