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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

(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이 즉위할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명덕태후부터 공민왕이 암살된 위급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종친을 추대하려고 했고, 

훗날 이성계 일파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할때도 

우왕은 적어도 최영도 인정할만큼 실정을 벌였으니 

의종처럼 그냥 폐위하면 될일이였는데 

궂이 후술할 폐가입진이라는 잘못하면 

무리수에 가까운 명분을 가져다 쓴 것도

당시 고려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등 조선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단 우왕신씨설의 주요 근거는 

고려사와 태조 기록에서는 

우가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조선시대 


즉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임으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 시킨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고. 

따라서 크게 자기 조상들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 인용> 

그리고 고려사 우왕편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 자체는 없었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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