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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폐위 그리고 비참했던 최후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음에도

출전했던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요게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개경을 포위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도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집에 없고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터라 ...망했다...

우왕 14년(1388)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ㅡ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 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 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왕의 무리수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


결국 이 때문에 분노한 이성계 일파한테 폐위된 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사돈의 형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으나,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조민수의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으나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창왕도 폐위되었고

결국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내세운 폐가입진론에 의해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향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 《고려사》 공양왕 원년

무덤 기록이 없고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내려오는 무덤이 있긴 하다.


이때 우왕의 아내 영빈최씨도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시체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체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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