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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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업적도 정말 찬란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업적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성군으로 포장된 세종이 아닌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비판이 존재하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성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맞다. 

포장이 아니다. 

오히려 업적으로보면 광개토대왕보다 더 다양한 업적을 남긴 군주이다.



사실 세종에 대한 비판점으로 제기되는 정책들은 

세종이 15세기, 

전근대 왕정 시대의 군주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요소가 많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성군'이라는 이미지에 안 맞는 몇몇 행적 때문에 

확 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행적도 조선 초기 당시의 상식과 관점에서는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잊은 채 세종을 다룬 각종 미디어매체에서 

세종을 15세기 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이상적인 지도자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세종의 진면목을 

제대로 묘사한 미디어매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처럼 

조선왕조에 현대 사회를 투영한 채로 바라보다 보면

아래와 같은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세종이 15세기 군주의 모습이라기엔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혁신적 면모나 시대를 앞서나간 발상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사실이지만,

세종은 근본적으로 

현대 민주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15세기 조선의 왕이었고


그 시대의 요구와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 정책들을 

입안, 실행하는 데에 충실했던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나 지금이나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세종의 진정한 장점과 리더십을 파악하고 

그를 제대로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셈.











본인은 이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는 

역사를 많이 모르기에 심도있게 알아보고자 퍼온글이다.

흠... 먼가 너무 현대사에 입각해서 세종대왕을 리뉴얼한것에 대한 비판이지

그의 행실이나 그의 그릇된부분을 꼬집고 태클을 걸기위함이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당대의 왕이 당시대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고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다시금 선별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서 

읽으면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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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전에 등장하는 사람 뿐 아니라,

현대 매체에서 중요하게 각색되는 사람들...


1. 홍상직 - 아버지. 홍징은 할아버지 성명이다. 

소설 이후로는 홍정승 혹은 홍판서이라는 성명으로 각색된다.


2. 홍인형 - 소설에서 형으로 등장하는 사람. 

소설 이본에 따라서는 홍길현이란 성명으로 나오기도 한다. 

따뜻하고 강직한 성품으로서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그 덕분에, 도적이 되어 버린 홍길동의 일탈성 면모를 느끼게 하는 사람.

주인공에 대비되는 사람을 무조건 찌질이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소설다운 가치를 잘 보이는 인물인 덕분에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라서 실재한 사람의 성명이라고 믿는 사람이 꽤 많은 만큼 

바람직한 형을 대표하는 캐릭터. 

모티브는 실재한 사람 도적 홍길동의 둘째 형인 홍일동


3. 백운도사 - 사람을 죽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홍길동에게 

도술을 가르쳐 준 선인.

원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홍길동에게 스승 자체가 없으나

왜인지 매체에서 자주 나온다.




4. 마숙 - 홍길동의 부하로 율도국을 정복할 때 후군장으로 공을 세운다.

홍길동이 왕이 되는데 1등 공신 격이지만, 

매체에서는 삭제되거나 악역으로 나오는 등 취급이 좋지 않다.



5. 차돌바위 -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를 창조한 화백 

신동우의 명작 <풍운아 홍길동>에서 나오는 사람. 

방자 스타일의 전형인 동료.


6. 덥석부리 장군 - 마찬가지로, <풍운아 홍길동>에서 나오는 수하. 

산적 버전 관우 이쪽은 신동우 화백의 개성이 강한 사람인지라 

변주곡으로 등장하는 때가 적은 편이지만, 

홍길동 자체가 현대로 들어서 가볍고 친숙한 이미지로 변하는지라 

주인공 대신 무게감을 잡아 주는 무뚝뚝한 산적이 한 명씩 나오는 편이다.



7. 곱단이 - <풍운아 홍길동>의 여자 주인공. 

청초한 여자의 전형으로서 홍길동에게 구출되어서 

도적단의 가사를 돕게 된다. 

후대의 현대 매체도 이렇게 청초하지만 

도적단을 돕는 여자 이미지를 답습하게 된다.


8. 돌순이 - 홍길동의 첩을 재해석한 캐릭터. 

방자의 여성 버전인 향단이의 변주곡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조선 왕조 시절에 나온 <홍길동전>의 여러 판본 중에서도 

활극에 어울리게 무예에도 능한 첩들이 있다.

현대에 가장 유명한 것은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돌아온 홍길동'괴작에서 나온 

히로인 2호. 

오타쿠 세대에게는 유일하게 건질 캐릭터라고 평가받는다. 

전형적인 새침데기 미소녀지만, 당연히 홍길동에게 퐁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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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 홍길동의 초능력


홍길동의 초능력


1. 분신술: 홍길동의 초능력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능력. 

분신들이 제각기 사고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번에 10명 이상 홍길동이 전국에서 활약하다가 단체로 잡혀와서 

대신들을 조롱하는 장면이 백미. 

그리고 아버지와 형을 구명하려고, 

대신들 앞에서 분신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모습은 

소설판 홍길동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2.바람 술법: 바람을 만들어내고, 

국소적으로 날씨까지 조종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바람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악행을 일삼는 관리들에게 경고를 보낼 때도 돌풍을 사용한다. 

심지어 바람을 타고 행글라이더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묘사도 있다. 


3.환술: 환상을 보여주거나, 텔레파시 능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정신을 억압하는 해석도 있다. 

의외지만, 홍길동이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능력이다. 

일부 판본에서는 사이코메트리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보거나, 

심지어 독심술이나 예언능력을 가지기도 한다.


4.인형 술법: 분신술에도 사용하는 인형을 저주용으로 사용하는 능력. 

이걸로 사람의 육체를 강제로 움직이거나 

멀리서도 고통을 주거나 손을 대지 않고 죽여 버리기도 한다. 

본래 소설에 등장하는 성격과는 다르지만, 

후대의 각색 중 하나로 추가되었다. 그 대표가 개그 영화 〈슈퍼 홍길동〉.


5.퇴마술: 후반부에 율도국을 세울 때 대결한 상대. 

한국 요괴 문서에 나오는 거대 이무기, 

혹은 지하국대적(오우거와 비슷한 괴물)을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귀신, 요괴와 엮일 때는 주문을 외워서 쫓아버리는 언급도 있다.


6.변신술: 일부 판본이나 현대 각색에서 등장하는 능력. 

사람, 동물, 무생물로도 변신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일본의 모 거대로봇으로 변신하는 황당무계한 개그 만화도 있었다. 

단순히 다른 사람처럼 변장을 하는 능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은근히 여장 속성이 있는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이, 소설에서 나오는 묘사만 해도 초능력자 혹은 완벽초인 수준이다. 

소설 홍길동전의 백미는, 

이러한 슈퍼 파워를 가진 의적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뇌하는 과정에 있지만 

결국 고국을 떠나서 무인도에다 이상국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면, 

강력한 영웅 한 명의 힘으로도 세상은 바꿀 수 없다는 교훈까지 보인다. 

정말로, 현대의 슈퍼 히어로들의 스토리와 똑같다!





화백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 이후에는, 

파란색 쾌자를 입고 초립을 쓴 보부상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백성답게 흔히 생각되는 복식이기 때문에 

창포검과 함께 홍길동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머리에도 조선 시대 백성이 흔히 사용하던 고름 달린 흰색 두건을 맨다.

현실에 알맞게 묘사하려는 매체에서는 살구색, 붉은색 외투를 입히기도 하지만, 

역시나 홍길동하면 푸른 계통의 외투를 입혀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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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홍길동 면모



도적이면서도 무술, 학문, 점술, 용병술, 초능력에 두루 능한 천재형 사람이다.

이는 실존했던 홍길동도 나쁜 짓 했던 것을 빼면 

권력층의 서자로서 제법 훌륭한 지략을 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설이나 소설에서나 지략파 의적으로서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홍길동의 활약은 마을, 군대,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에, 

외국의 전설에 나오는 도적들과 비교해도 스케일이 큰 편이다. 

→단 대륙의 기상인 수호전과는 물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수호전은 두령만 108명이고 졸개는 만 단위로 헤아리니... 중국은 자국 내 다툼조차 웬만한 국가 간의 전투 규모라서 그럴 수 밖에 없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지략 면에서는 웬만한 영웅들보다도 훌륭하지만 

마지막에 왕을 세우고 첩을 만들었다는 언급 때문에 

개혁을 이룬 사람이 아닌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는데

아나키즘 같은 사상조차 무턱대고 왕을 없애서 이상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없애서 사회를 발전하게 하자고 주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홍길동의 행적을 겉으로만 착한 체한다고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다.

→당초 이상향이라는 것도 그 상상력이 발휘된 시대의 한계에 종속되는 것인데, 이를 현대의 정치관-윤리관에 따라 비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노예제가 있고 전쟁하기도 하고 식민지도 만들고 억압된 사회이기까지 한데?



단순히 탐관오리들을 조롱하는데 그치지 않고

벼슬에 진출해 나라를 침략하는 오랑캐를 토벌하거나 

새로운 이상국을 세우는 행보만 봐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당장에 홍길동이 상대하는 단위는 대부분 군대인데 

살상 행위는 갈수록 준다는 점만 봐도, 의외의 깊이를 부여한 캐릭터이다.




전설 대다수에서 홍길동은 초능력만으로도 최강이라서

스토리 대다수가 자신의 정체성 탐구 및 세상과의 싸움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외 여타 도적 설화와 크게 차이 난다. 

RPG에 비유하면 고레벨 시프+메이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바꾸려는

스토리에 가깝다. 

중세 소설인데도 괜히 고평가받는 게 아니다.



소설에서도 홍길동은 상황이 꼬인 끝에 사람을 몇 명 죽이고 괴로워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겸손하고 선량한 의적으로 바뀐다.

현대 홍길동의 이미지를 창조한 화백 신동우의 명작 만화 

<풍운아 홍길동>부터는 아예 사람을 죽이지 않는 불살을 지키는 의적이 되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홍길동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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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주인공 

홍길동!

홍길동전의 주인공으로 초능력이 있다. 

허균이 동기로 삼은, 연산군 통치기에 활동한 도적인 홍길동과는 발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이것은 저자인 허균이 두 사람을 분리하기 위한 장치인 듯하다.


물론, 실재했던 홍길동도 후대에는 의적이자 영웅으로 일부 반가에서 인기가 있었다. 

소설을 지은 허균은 이러한 평판을 빌려서 

조선 시대의 계급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안티 히어로로서 의적 캐릭터 홍길동을 창조했다.

현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홍길동이 안티 히어로라는 말이 어색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실재한 사람부터가 도적이고 소설 내부에서도 홍길동은 초반에 온갖 소동을 일으키면서 노비의 자식이라는 혈통에도 율도국을 세우면서 계급 사상을 완전히 비트는 결말을 보이는 주인공이다. 참고로, 당시 오락 소설들은 주인공들의 핏줄이 죄다 죄다 입신양명을 부르짖는 유교다운 선비의 혈통을 강조할 정도로 유교 사상에 찌들어 있는 상태였다.


실제 홍길동은 연산군 통치기에 때 활동했으나 

홍길동전은 문종 통치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소설 도입부는 조선조 세종 (1397 ~ 1450) 통치기에 태어났다는 내용이지만, 홍길동이 청년이 돼서 활동한 시대를 계산하면 문종 시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소설 속의 설정이다


다만, 실재했던 홍길동은

오히려 높으신 분들의 인맥을 활용했던 

지능형 범죄자에 가까워서 소설의 주인공과는 정반대지만, 

소설의 평가는 당대 양반들에게도 교훈적으로 받아졌다. 

즉, 실재한 홍길동도 서자라는 한계 때문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비뚤어진 행보를 보인 것을 아깝게 여긴 듯 하다.

'홍길동이 도술을 부릴 수 있다'라는 설정도 유명한데, 

이는 실존했던 홍길동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생겨난 전설들을 차용한 것이다. 

홍길동이 역경을 만나고 고뇌할 때마다 

보이는 배경 묘사가 명장면이라서 소설다운 가치도 높다. 

현재까지 수많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대표 히어로라고 하면,

의적으로 각색된 홍길동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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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도적 홍길동 의적으로 변하다



실재한 홍길동은 잔혹했으나 몇 세대가 지나자

 '폭군의 시대을 엿먹인 도적'이란 명성만 남게 되었다. 

결국, 홍길동은 지배층을 까고 싶은 욕구와 맞아떨어져 아름답게 꾸며지기 시작한다. 

이는 일본의 이시카와 고에몽과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홍길동이 의적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던 것은 

홍길동이 살아 있던 시기의 왕이 다름 아닌 연산군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연산군을 혐오했던 반가에서도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당시의 연산군은 대신들과 적절히 타협하며 

국정 업무를 잘 하고 있었다.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망가지는 것은 갑자사화 이후이다.




그 후 소설 <홍길동전>이 나오면서, 

아예 뜻이 뒤집혀 소년들이 홍길동의 성명을 걸고 맹서하는 

의적 캐릭터로 유명해졌다. 

덤으로 후대에는 김옥균을 쏜 홍종우, 길영수, 이기동이 개혁을 함께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큰 활약했다고 해서

성명 중 한 자씩을 따 ‘홍길동’으로 불렀다는 말도 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일명 아치실 마을 측과 

강원도 강릉시 측에서 

서로 홍길동의 고향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장성군수 모 씨는 『증보해동이적』에서 홍길동은 장성 아차곡 출신이라고 나오므로 홍길동의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강릉시장 모 씨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고향이라서 각자 홍길동의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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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도적 홍길동 최후와 전설


홍길동이 탈옥해서 오키나와에 갔으며

후일 그 후손들이 홍가와라라는 성명으로 오키나와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500년에 류큐 남부 이시가키 섬에서 반란했던 

호족 오야케아카하치(オヤケアカハチ)와 홍길동을 

같은 사람으로 추정하는 설인데 확실한 증거는 그다지 없다. 



시기상의 일치, 한반도 도자기와 동전 출토 등을 제외하면,

홍길동과 오키나와를 연결하게 하는 인터넷 자료들은 확실한 출처가 부족한 데다가 전부 한국에서 나온 자료 뿐으로 

일본 측의 자료는 없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홍길동은 1500년 10월 22일에 잡혔는데 

오야케아카하치는 같은 해 2월 13일 

류큐 왕국에서 파견된 관군 3000명과의 대결에서 패배해 죽었다.

즉, 아카하치는 洪吉同이 체포되기 이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오야케 아카하치를 언급하면, 오야케는 호족과 같은 뜻이고 

아카하치는 성명으로, 오야케 아카하치는 '호족 아카하치'라는 경어에 해당한다. 

전설로는, 그 사람은 출생이 불명확한 사생아로서 묘사가 되어 있어

[신성한 지역에 조난당해 온 포르투칼 사람과 신녀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아카하치라고 한다.]



타지에서 왔다거나 조선 반도에서 온 홍길동이라는 전설이 붙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홍가와라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는

'오야케 아카하치=홍가와라'라는 설은 책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던 표기가 

후대에 전해지면서 생긴 차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 류큐의 역사서 <구양>(球陽)에서는 같은 사람으로 본다.



사서와 같이 다른 사서 등에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채록되어 있을 뿐이다. 

오키나와의 현재 역사 교과서에도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가와라와 아카하치와 다른 사람이라는 설을 좇으면, 

이 사람들은 아들이나 형제나 외지에서 온 사람로 거론하는데 

당시 아카하치가 있던 거점인 이시가키 섬은 

원래 여러 세력이 다투는 중이었고 

아카하치도 그중 하나의 세력이었는데 

아카하치는 이시가키 섬에서 원래 살던 사람이 아니라 

하테루마 섬에서 이주한 사람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받아서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냐는 이야기가 거론되지만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아카하치가 외지인의 자식인 데다가 

거점으로 삼았던 이시가키 섬이 아닌 하테루마 출신의 이주한 사람이라는 점과 

홍가와라라는 별칭이 붙었던 점에 의해 

국내 일부 사학자가 여러 가지 엮지만 증거에 있어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정조 시기 황윤석이 쓴 <증보 해동이적>을 보면, 

홍길동이 조선에서 탈출해 타국으로 가서 

왕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말은 없고 

그냥 당대에 떠돌던 소문 기록한 내용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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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도적 홍길동 활약과 체포


실존한 홍길동은 잔인해서 

자신의 정체를 알릴까봐 자신을 숨겨준 가족을 죽이거나, 

얼굴 가죽을 벗겨서 매달아 놓기도 했다. 

당시에는 홍길동의 성명이 욕설로 쓰일 정도였다. 

특히, 충청도의 피해가 극심해서

유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고 세수가 안 걷힌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면 문금리에 유독 홍길동 관련 구전이 많이 전해진다.궁금하면 동네로 찾아가서 마을 주민에게 여쭈어 보자! 심지어 이 마을에 있는 금계산에는 '홍길동묘'라고 불리우는 장소까지 있다]

당연히 조선 조정에서는 홍길동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지만

머리가 좋아서 관군들을 농락하면서 도망한 데다가

상술했듯이 조선 조정의 관리들을 포섭해 비호받았는데 

그 대표로 당상관을 지낸 무관 엄귀손이 있다. 

엄귀손은 정3품 절충장군으로 탐관오리로도 유명했는데 

홍길동과 결탁해 갖은 부를 축적했다. 

홍길동은 엄귀손의 비호하에 조선 조정의 관리를 사칭하는 등 

범죄의 판을 더 키우다가 결국 1500년에 체포됐다.




실록에는 홍길동을 체포하고서 홍길동을 도운 사람을 처벌한 내용이 나온다.

체포된 홍길동을 처벌하는 논의도 있지만, 정확히 처벌 기록은 없다.

다만 그 죄질이 매우 극악무도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사형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픽션이지만 신봉승의 조선왕조 오백년 원작에는 늪에 몰려서 생포되고서 코렁탕 모진 고문 끝에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뼈가 분쇄돼 바람에 날아가는것으로 처리하지만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홍길동을 도운 엄귀손이 고문받고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는 기록은 있다.]



결국 실재했던 홍길동의 생몰년은 의견이 분분한데 

체포된 해에 사형됐다면 1500년에 죽은 것이 되지만 

1501년에도 기록이 있고 

그 후에도 처벌된 기록이 없어서

갇혀있다가 탈옥했다면, 그보다 한참 후가 홍길동의 몰년이 된다.

생년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홍길동의 형인 홍일동이 1412년 출생이므로 그 후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장성군에서 전해지는 얘기에는 1443년경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이 경우 잡혔을 때 57세로 막 환갑을 바라보는 초로의 나이로 보인다.



홍길동이 탈옥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홍길동은 포도청이 아니라 의금부에서 추국했고 

훗날 중종 18년에 도적 60명의 탈옥을 방지하려는 논의에서 

남곤과 이유청이 

"지난번 경신·신서 연간에 있었던 홍길동의 옥사를 거울삼을 만합니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홍길동의 옥사에서 탈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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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도적 홍길동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때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시오소서"

- 조선왕조실록 1500년(연산군 6년. 경신년) 10월 22일(계묘) 기사 -



의금부의 위관(委官) 한치형(韓致亨)이 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玉頂子)와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9권, 연산 6년 12월 29일 (기유) 기사-


본래는 실재했던 전국구 단위 도적.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편에서 중종편에 기록되어 있다. 

정승 또는 판서를 지낸 위의 소설과는 달리, 

홍길동의 아버지는 조정의 고위직과는 거리가 있는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를 지낸 무관이었다.

[홍상직은 고려 말 권신이였던 염제신의 사위였다. 

염제신의 아들이면서 이인임의 수족이였던 염흥방과는 처남 매부 관계라서 

염흥방 일파로 몰려 아버지 홍징과 다른 형제들은 처형됐고 

홍상직은 처가의 힘을 빌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전라도 장성으로 은둔해 터를 잡았다. 

사족으로 홍상직의 외손자는, 연산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후일 반정에 가담하는 유순(조선)이다.]


홍길동의 가문이 실세가 된 것은 형들의 대에 이르러서인데 

홍길동 위로는 적자 출신인 형 홍귀동과 홍일동(1412?~1464)이 있었다. 

홍일동은 세조 찬위에 참가해 원종공신 2등훈에 책록됐고 

실제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유명한 대식가이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를 보면, 

그 사람은 진관사에서 생활할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 사람이 산 아래 왔을 때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홍일동은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홍일동은 사실임을 아뢰었고 세조는 장사(壯士)라고 말했으나 

평상시에는 미숫가루를 먹고 맑은 술만 마셨다. 밥을 먹지 않았다.

1464년에 그 사람이 명 사신을 접대하다가 홍주에서 폭음으로 죽었을 때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생각했다.]



홍길동은 전국구 도적패를 이끌었는데, 평범한 도적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부하 중에서 일부가 

벼슬아치와 결탁하거나 가끔씩 당상관으로 행세했다는 기록을 봐서는, 

높으신 분들과의 친목 관계를 잘 이용했던 인텔리 범죄자이면서

검계의 폭력배들을 이끄는 무력까지 겸비한 능력자였다.

덤으로, 위의 의적과는 다르게 중년에서 할아버지로 추정된다

[단 검계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홍길동보다 훨씬 뒤인, 200년 뒤 숙종 통치기때이다. 

물론, 명칭의 차이는 있지만 실재한 홍길동의 행적은 

이후 여러 검계와 거의 같거나 오히려 상회한다. 검계의 전신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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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君所畏者, 史而已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 뿐이다. ㅡ 연산군


조선의 10대 왕. 

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폐비 윤씨다. 

본관은 전주 이씨.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막장은 거의 없다. 

충혜왕을 비롯한 조선 이전의 일부 연산군을 초월한 

막장 오브 막장 임금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이 그나마 괜찮은 편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그런 임금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충혜왕은 누구라고 콕 집을 것 없이 

그냥 다같이 미쳐 돌아가는 막장 분위기 속의 막장 임금이었던 반면, 

연산군은 잡다한 문제가 있긴 했어도 

어느 정도 균형에 맞춰 멀쩡하게 돌아가던 정치판에서 

뜬금깽판을 쳐버렸으니 더욱 막장일 수밖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이 이전의 건강함을 점점 잃어갔으며, 

이후 즉위하는 조선 왕의 능력 부재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문정왕후의 외척 세도를 거쳐, 

결국에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평가한다.

문제점도 있었고 뻘짓도 있었지만, 아직 망할 나라는 아니었다. 



실제로 임란 이후로도 300년을 더 갔고. 

연산군의 막장짓에 비례해서

조선왕조상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2년간일지도... 


조선 역사 중에서 묘호를 받지 못한 4명의 왕들 중 하나이나, 

본인에게 딱히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공정왕), 

성인도 되기 전에 작은아버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노산군),

실리외교와 분조 지휘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 빛나 보이는 등의 재조명으로 인해 

현대에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광해군과는 반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막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물론 나라에 해를 끼친 왕이야 조선 시대에도 꽤나 많았지만, 

그 왕들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최소한의 업적은 있거나, 

무능했으나 일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공이 있거나 등의 최소한의 실드 칠 거리라도 있는데,

연산군은 그조차도 없다. 

즉위 초기에는 일을 좀 잘했다는 정도가 있으나, 

그 뒤에 저지른 행동들이 너무나도 잔혹하다.


다만 연산군이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이후로, 

그 이전까지는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긴 했지만 

행정적으로 국가는 그럭저럭 운영해 나아갔다. 

재위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기간 중에는 오히려 평균 이상으로 집무했던 시기가 더 길었다는 것.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정세력이 편찬한 《연산군일기》에는 약간 의심되는 내용도 있는데, 

가령 연산군에게 엿 먹은 대비가 다음날 태연히 연화대에 구경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 떨어야 할 사람이 저러는 둥 

정상적 심리상태의 정황과 어긋나는 이상한 점이란 것인데, 

전문이 이러한지라 반대로 연산군이 둘러댔다고 보기도 한다.


"대비께서 연화대를 구경하려 하시니,

놀이하는 사람을 급히 대궐로 들여보내라.

옛 사람이 온실의 나무조차 말하지 않은 것이 정말 이유가 있는 것이니, 

이런 일들은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게다가 설령 왜곡된 부분이 있다 해도, 

"알고 보니 연산군도 착했다"고 봐서도 안 된다는 것에 주의하자.


연산군이 시도한 무리한 왕권의 강화는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가 되었고, 

무엇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러한 신권(臣權)의 압박에 제대로 시달려야 했다.


중종의 경우, 형처럼 처용무라는 춤을 좋아해서 즐겨 추었는데, 

신하들이 처용무(處容舞)가 연산군이 즐겨 추던 춤이라고 간언해 

중종이 춤도 못 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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