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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 부민고소금지법(수령 고소 금지법)



태종 재위기간인 1410년에 실시되었다가 

반발이 심해 일시 폐지되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세종 때 다시 시행된다.

이 법을 제안한 사람은 허조로 태종~세종대 최고의 예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송골매 재상'이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퍼진 이야기는 허조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세종이 들어 주었고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오는데,

→세종 9권, 2년(1420경자/명 영락(永樂) 18년) 9월 13일(무인) 4번째기사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대에선 이 법안을 들어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군주가 아니었다'라는 

비판도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피해주는걸 용납치 않은 전근대

유교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정권이다. 

고려까지도 지방은 그 지역의 토호와 향리가 대를 이어서 계속 통치를 하고 있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현은 물론이고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도 

향리가 군사, 행정실무를 수행하는 읍사(邑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지방세력의 권한이 강했다. 

고려가 안정적일때는 

적은 비용으로 쉽게 지역여론을 장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무신정권이후 중앙정계가 흔들리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처음부터 국왕 대리인인 지방관의 권한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이 지방에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힘들었다.

지역마다 제도가 다르니 조세는 형평성을 잃었으며 

권문세족의 침탈에도 취약했다. 

급기야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노비가 수령을 깔아보고 심지어 폭행하는 사례가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향리와 토호들은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안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몽골과 왜구와 침입으로 유민이 급격히 늘어난 고려 후기에는

한계를 여실히 나타내며 쇠락해갔다.



조선은 이러한 전 왕조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중앙집권화와 수령의 권한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이 법이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에게 불복하고 

중앙정부의 시책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치 않겠다는게 그 진짜 뜻 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없을 순 없겠지만 

조선 정부는 무신정권 이후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방행정 확보가 무력화된 상황을 극복하려면 

이 정도 법안이 필요하며, 그로인한 효과가 폐단보다 크다고 보았다. 

강화된 권위를 가지고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중앙정부에서 부여받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축적했다.

이는 공법을 비롯한 세종대의 여러 국가시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조선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괜히 세종실록에만 세종실록지리지가 붙어있는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 법이 있다고 고소를 안한게 아니다. 

법이 있건말건 무시하고 고소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1429년에는 고소가 끊이지 않는 수령은 장100대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던 세조조차 

별것 아닌 일이나 허위로 신고하는 폐단이 너무 심해져서 도로 부활시켜야 했다. 

게다가 법이든 뭐든 상관 않고 철판 깔고 고소하는 사람뿐 아니라, 

법적 절차로 전가사변이라는 형벌을 새로 신설해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최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즉 부민고소금지법 하나 믿고 갑질했다가는 

야인들이 득실거리고 추운 변방으로 끌려가야 했다는 것. 

세조 때 잠시 폐지된 원인도 이 법이 원래 폐단이 심한 법이어서가 아니라 

쿠데타 과정에서 막강한 특권층을 형성시키고 

이들을 쳐내지도 않은 세조의 통치탓에 

특권층과 결탁한 이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수령고소금지법의 폐단을 심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세조 시기 지나치게 비대해진 특권층과 지방세력의 충돌은 재위 말년 이시애의 난이란 사단을 불러온다.




또 조선에서 수령의 수탈이 심해진건 어디까지다 매관매직이 일상화되고

모든 견제 수단이 사라져 수령권이 크게 강력해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굳이 따지면 조선 명종~선조 전반기도 각종 군역과 공물 부패가 심각했던 시기이긴 했다.



이렇게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임진왜란 때 수도가 점령당하는 초유의 사태 때도 버텨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꾀할수 있었다

→한 예로 임진왜란때 경상도 좌병사 이각이 도망쳤는 데 그 자리에 박진이 앉고 업무를 시작하자 흩어졌던 이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해서 의병과 관군이 연합해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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