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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대외교

세종대왕은 지금에 와서야 

훈민정음 덕분에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대왕 역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심지어 사신 접대에 과중한 비용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소에

라고 답한 사례가 있긴 하다.

대국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백성의 곤궁함은 가벼운 일이다

 그의 통치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 말도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게 세종이라고 진짜 백성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신의 모함이 두려워서 그럴수도 있다. 조선과 명나라간 관계가 괜찮아지기야 했다만 초반기만 해도 영락제 제위 시절이고 그나마 나중에 선덕제 그 다음이 정통제 시기라 정복은 줄어들었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명나라는 이때 전성기 시기로 조선은 굽신거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명나라가 쳐들어오면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세종대왕도 이런 사신들을 안좋게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명 황제가 사신의 과도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그 즉시 사신들의 요구를 많이 쌩깠다. 실제로 조선에서 조공으로 바치라고 하는것보다 사신의 요구가 더 큰 부담일수가 있던게 사신이 서너개의 궤짝(상자)를 들고 와서 200개의 궤짝을 들고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명나라는 활발한 정복전쟁 중이었고, 

명은 당연하게도 조선에 대해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태종 때부터 쇄도한 공물은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은 그 많은 군수품과 공물을 대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는 없었다. 

명은 공물 뿐 아니라 말이나 환관, 심지어는 처녀까지 요구했고, 

그 때문에 딸 있는 집안은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기에 바빠서 

매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명나라 황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발되었는데도 

기록들을 뒤져보면 당연히 기피했던 것 같다.

기록에 명 사신 앞에서 대놓고 

병신 흉내를 내기까지 해서 명 사신이 벙쪘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왕이 고려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왕위를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뭇 사람들이 원나라 황실에 줄을 못대어 안달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

→이런 공녀제도가 폐지된 건 성종 때이다.

사냥을 좋아하던 명의 선덕제는 조선의 해동청과 큰 개, 스라소니를 원했고, 

조선의 모든 지방관들의 1차목표는 바로 해동청, 큰 개, 스라소니의 포획이었다. 

당시 조선 8도가 선덕제의 요구로 인해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끄러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명 사신접대에 대한 과도한 지출도 대단한 문제였다.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백관과 왕이 한 데 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 다음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당연히 그 잔치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때문에 길목인 황해도 지방은 후유증이 상당했고, 

도적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세종 시대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이 정상화 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일단 명에 보내는 공물이나 예물 중에서 금과 은을 제외하게 된 것이 

세종대왕 때부터 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이나 은은 화폐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은 경제에 심한 부담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로비를 통해 조선출신 환관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옛날에는 조금 나왔는데 이미 고갈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조공 항목에서 금은을 삭제한 것은 큰 공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금과 은이 산출되는 것을 알게 된 명은 본격적으로 금과 은을, 특히 당시의 기축화폐이던 은을 바칠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대는 조공물품인 10만냥의 은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지역의 군벌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원군 파병이나 자신의 약한 정통성 문제로 약점을 잡힌 처지라서 내놓으라는 대로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더욱이 세종 후기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개인 선물(=로비) 역시 

황제의 명으로 금지되었고, 

환관 출신 사신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여러모로 문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대명 사대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고,

특히 태종 이후로는 더 굳어졌다. 

영락제나 조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세종 조선의 조공 정책은 조선에게 엄청난 무역흑자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세종대의 명나라 황제는 바로 그 영락제.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하고 몽골과 베트남까지 원정을 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바다 멀리 골치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먼치킨급 인물이었다.

따라서 주변국이 개기면 바로 짓밟아버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뻘짓을 했다가는 명나라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의 남월(베트남) 정벌을 보고 식겁한 장면이 나오고 

세종 대에 들어서 결국 독립한 베트남을 보고 기뻐하면서 

대놓고 황제를 신하들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까짓거 한판 붙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또한 이러한 세종의 지성사대론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국'인 명에 대한 지극한 사대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즉,"내가 이렇게 명나라를 잘 섬기니 

니들도 이를 본받아 나를 극진히 섬겨라"라는 식의 메시지라는 것.

이런 모습은 조선왕조 대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모토가 자성사대인 만큼 이것은 정말 좋은 명분이다.


흥미롭게도 명나라에서도 

태평성대였던 조선을 어느 정도 경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일어난 어여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의 왕이 어진 이로 번창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다."하여 

관련자들의 출국을 금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여말선초에는 명나라와 사이가 험악하기도 했었고,

"혹시, 조선이 쳐들어오지 않을까?"하고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을 보면...



무엇보다 세종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용주의자임과 동시에 조선주의자였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훈민정음》이나 《칠정산》을 만들 생각도 없었을 터, 

비록 당대 명나라가 그 영락제 치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라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을 뿐,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내내 조선의 정체성과 실리주의를 지속히 강조했으며,

이 태도는 문종과 세조에게도 이어진다.

→다만 영락제 사후 선덕제도 전술했듯이 영락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에게 꽤 많은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선 해동청 잡아올리느라, 공녀 뽑기, 사신 접대하기 등으로 전국이 들썩거렸다. 사대외교가 순전히 실익 정책으로만 자리잡은 것은 선덕제 사후다.

→특히 세조 시기에는 야인들과의 교류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명 사신의 요구를 함경도 관찰사가 알아서 무시하는, 일부 양반계층의 지성 사대론이나 현대의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도 일어났을 정도로 발전했다. 임진왜란 이후론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다시 안습해지지만...


또한 당시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순장 풍습을

"아무리 중국의 풍습이라지만 이뭐병이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당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꼬장의 대가 허조가 대표적이었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홍희제 즉위하자 

영락제를 위해 영락제가 총애하던 

조선인 궁녀 한씨를 비롯한 궁녀 15인을 

순장했단 말을 듣고는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 말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데 

황제의 무덤에 궁녀 15인을 순장했다니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것이 못되옵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명나라엔 

원나라의 "오랑캐"스러운 풍습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말이다.


분명한 것은 세종 후기 이후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무역흑자라는 실리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초중기 백성들의 고통도 분명 있었지만 

결국 조선은 이러한 조공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냈고,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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