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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임진왜란까지 업적

1540년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현 경기도 평택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 집안 출신이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원준량.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원균의 무과급제는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이 작용한 부정시험의 의혹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0권 19년의 6월 21일의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은 바 있다. 

이때 원균의 나이는 24살로 입시에 응할 나이이며 원균의 바로 아랫동생인 원영은 21살이나 문과 급제생이었고 남은 두 동생들은 무과에 응시하기엔 지나치게 어렸을 것이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



김탁환의 소설 불멸이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록에 그가 어떠한 군공을 세운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그의 승진속도는 꽤 빨랐으며 

과거 급제한 뒤(1579년) 12년 만에 경상우수사에 오른 것을 볼 때 

군공을 세웠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원균 옹호론자들이 조산만호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말하는데 

승진기록만을 볼 때 조산만호에서 부령부사로 특진한건 기록에 나와있고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隆慶元年丁卯式年文武科榜目)』] 시전부락 전투에 

당시 종성도호부사(약칭 종성부사·종3품)였던 원균이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하기는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순신과 달리 자세한 전공기록은 없다.


이 전투에는 이순신 또한 원균과 같은 계급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나이는 5년 어려도 급제는 3년 먼저 했으니 이순신은 원균의 선배인 셈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조선왕조실록》 선조 25권, 2월 4일(신미) 1번째기사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런 자리에 앉기엔 성과가 형편없다"라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부임한지 3개월 뒤에 그의 인생을 바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수사에서 일 못한다고 탄핵받은 인사가 경상우수영에 임명된 걸 두고 논란이 생기는데 당시 무관들의 평균적인 수준을 이해해야 한다. 문관들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는 무관들이 평시에 불량한 행실, 행정능력 미숙 등으로 탄핵받는건 무척 흔했다. 별시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식년무과만 노려 급제한 엘리트 무관이면서 행정능력도 정상급에 꼬박꼬박 독서하며 독후감쓰고 시도 짓던, 문관 수준의 식견과 교양을 갖춘 이순신은 당시 무관들 중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조정도 무관들에게 그런쪽으로 기대는 많이 하지 않았고 전시에 싸움잘하고 용맹하길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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