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顯世子 1612.1.4(음력)-1645.4.26(음력)
소현세자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 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지 3달도 못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런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해석은 알아서.)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고
지관들이 정한 장지더러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유일하게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독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묵던 곳에서 쓴 편지를 보면
세자는 원래 귀국 직전부터 몸이 안 좋았고,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완전히 한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단순한 의료사고였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는 소리.
또한 간이 안 좋아 사망한 경우에도 얼굴이 검게 물들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또 최근 세자 일기가 번역 되면서
독살설 보다는 처방을 잘못해서 죽었다라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좋던 사람이 실력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 야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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