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의명(依明)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



인조는 16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왕 광해군의 명청(明淸) 평행의 중립외교를 파기하고 


확고한 의명 및 친명배청 정책을 고수하며 편향적 외교를 추구해왔다. 


또 명나라를 은국(恩國, 은혜로운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받들며 


조명(朝明)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반면 


청(淸)에는 명(明)을 위협하고 멸망시킬 

도덕도 예의도 없는 패륜의 나라이자 

오랑캐들의 나라라고 비방하며 

청을 배척하는 외교책을 폈다. 


또한 명(明)이 청(淸)으로부터 위기에 처하면 형제국으로서 도울 것이라고 표방하고 

명과의 맹방(盟邦) 관계를 과시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수준으로 갔다.


또 전왕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폭군의 잔재가 담겨있는 정책이라며 과감히 파기하고 

상국과 오랑캐 따위와 평행을 간다는 것이 치욕적이라 생각하며 

상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여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도 하였다. 


광해군의 양면외교를 크게 비틀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만 

강홍립의 가족들을 처형한 것이나 국교단절 등을 한 것과 

공개적으로 친명배금을 표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오랑캐의 기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현세자가 가져온 서양의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등 

서양의 기술도 철저히 배척했다.


인조의 이러한 친명 및 의명 정책은 

명을 적대시하였던 청에게 자극을 주었으며, 

청은 이러한 조선을 자신들의 체제를 모독하고 

적국에게 굴욕하듯 개 노릇을 하는 망발을 한다고 하여서 

응징으로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북방군이 아작난 틈에 

이괄의 잔당들의 설득에 움직인 홍타이지는 

마침내 준비 끝에 조선을 침략해 

1차적으로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정묘호란에서 얻은 이득으로 

대규모의 군세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인조는 이 두 호란에 파탄을 부른 임금으로 낙인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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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해석


누가 어떤 복장을 입건 신경 쓰지 않는 현대에서는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때 인조가 청나라 복장을 받아 입었다는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그 까닭은 옛날 사대교린 관계에서 의복의 제도는 천자가 결정하여 


제후와 신하, 백성들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신분의 고하귀천에 따라 


의식주의 제도를 모두 법도로 정했으며, 


이는 천자가 지배자로서 


신민의 사생활조차도 간섭하고 통솔할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관복을 내려주는 것은 다른 나라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집어넣었다는 증명이다.



즉, 명나라의 의복 제도를 따르던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가 내려준 의복을 입었다는 것은 


조선이 명의 영향권을 벗어나 


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정치 퍼포먼스였다. 


중국의 변발이나 구한말의 단발령의 반발이 강력했던 것도 


당시에는 머리 모양도 이렇게 엄격한 의복 복제의 일부로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조는 곤룡포가 아닌 평민의 복장인 남염의(藍染衣)를 입었다.


죄인이라 용포를 입을 수 없다는 용골대의 의견과 용포는


명나라에서 하사한 의복이기 때문에 더더욱 입을 수 없었다.


항복 예가 끝나고 명나라에서 내려온 고명과 의복 장구류는 죄다 반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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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 형식은 아래와 같다. '상(上)'은 인조를 의미한다.

용골대(타타라 잉굴다이)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이를 보면 청나라 복장을 입고 절한 건 아니고, 뒤에 청의 복장을 받아 입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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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지맹(城下之盟) 


적군이 성벽 아래까지 쇄도해 온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굴욕적 맹약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한양에 침입해 오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게 대항하였으나,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끝내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사건. 


실록의 기록(효종, 현종 등)을 보면,

정축년에 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 했다. 

치욕의 역사인 만큼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한 편.


경술국치 이전까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었던 

국치(國恥) 중의 하나였다. 

인조의 지나친 편향외교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성향, 

그리고 지나친 의명(依明, 명에 의지하는 것) 성향이 

불러왔던 오판의 산물이기도 하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1세기에 이런 치욕적인 역사를 보자니 

단단히 빡친 시민이 페인트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고 

원래 있었던 위치라는 롯데월드 근처로 돌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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