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珥 1536년 12월 26일 (음력) ~ 1584년 1월 16일 (음력)



화담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과

퇴계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에 의해 

크게 떠받들어졌으며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흔히 이기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즉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까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분속설(理氣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 ] 




그런데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에게는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기 힘들다. 


덕분에 이황과 더불어 전국의 윤리를 택한 문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지탄의 대상(…).



[주기론]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된다. 














블로그 이미지

Preserved_Flower ♡

,

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진사과(소과) 초시→생원과/진사과 복시→문과(대과) 초시→문과 복시→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시험인 별시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 2,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생원과 초시 : 29세 

생원과 복시 : 29세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하고 합격) 

대과 초시 : 29세 

대과 복시 : 29세 

대과 전시 : 29세

별시 초시 :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4세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한 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에는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한 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선비들 사이에 오갈 정도로 책을 읽는 것은 어려웠다. 


2000년대 초반 한국으로 치자면, 

영어 전문 서적을 독해할 때, 

수십줄을 동시에 읽고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옛 고서를 보면 줄(계선)이 쳐 있는데 이를 행(行)이라고 한다. 

한 줄에 20자가 들어가면 10행 20자라고 표현하는데 

이걸 한 번에 읽었다는 뜻이 된다. 


못해도 200자의 한자를 한꺼번에 읽었다는 뜻. 

게다가 필사본이라면 

일반적인 목판본/활자본에 비해서 

작고 빽빽하게 적혀 있는데다 초서로 적혀 있어 

더 많은 한자를 읽었던 것 뿐만 아니라 

그 글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학습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뛰어난 사상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십만양병설의 진위 문제와 함께 서인의 거두로서 이이의 신격화 작업의 일부였다는 점을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러번 과거를 응시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 많이 존재한다.








블로그 이미지

Preserved_Flower ♡

,


이름 이이(李耳) 

출생 1536년 12월 26일(음력) 

사망 1584년 1월 16일(음력) 

출생지 강원도 강릉(고향은 경기도 파주) 

사망지 한성(現 서울특별시) 

분야 정치, 교육 

가족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사임당 신씨, 부인 노씨


李珥 1536년 12월 26일 (음력) ~ 1584년 1월 16일 (음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중기 예술가로 유명한 신사임당과 

그 아내의 명성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던이원수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본명은 이이(李珥), 호는 율곡(栗谷).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다.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이 모자는 한국 최초의 모자 지폐 인물이 되었다


반면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가 남긴 기록 중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그 형제들은 아버지와 상당히 자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썩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그 신사임당이 워낙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그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질투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


붕당정치에서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물론 생전에 그의 정책은 한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그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이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조선의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블로그 이미지

Preserved_Flow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