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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비판 : 화폐개혁


비판받아야 할 시책이라면, 

이미 자기 아버지인 태종이 하려다가 처참히 발렸던 화폐개혁 시도였다.

세종은 중국의(특히 당나라)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건국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것) 가 재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는데,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는 농본주의 조선에서 화폐경제체제가 

그리 쉽게 정착될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띄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 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조선은 상황이 달라 화폐개혁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량부족이었다. 

조선은 전 왕조에 걸쳐 고질적인 재정부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 태종이 먼치킨 취급 받는 것은 재정 흑자를 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국가 자체의 영세적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정부 재정확충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 조선 중후반기의 수령의 착취로 "조선왕조는 백성을 착취했다." 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아니다 그 거둔 세금은 거의 다 수령 주머니로 들어갔다.



게다가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거둔 세미를 전부 조운선을 통해

강이나 바다로 운반했는데, 종종 배가 침몰하여 

애써 모은 세미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기껏 운반해온 쌀도 습기에 젖어 불어버리거나 썩어버리기 일수였다.

이러니 충분한 화폐를 제조할만한 비용이 마련 될 리가 없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동전제조에 사용할 재료 마련도 힘들었다. 

전국의 금속이란 금속을 모아도 모아도 모자라 일본에 구리를 수입해오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동네북인 절을 또 두들겨 종까지 다 뺏어와 녹여야 했다. 


두번째는 조선의 교역경제 미발달이었다.

당나라 때를 비롯해 중국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유통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품의 양이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협소한 영토와 그나마도 산지가 많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풍부한 물자가 양성되지도, 그리고 그 물자가 유통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물자를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화폐의 필요성도 별달리 생기지 않았다. 

다만 조선후기에 오면서 상업과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평통보같은 화폐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최악의 화폐도 나왔다.

그러나 운반수단은 딱히 크게 발달되지는 못할 듯 하다.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운반수단대해 기록하고 있던 수레같은 경우 

쓰지 못하고 있고, 배에 대한 것도 낙후 되었있다고 한다.

(몰론 조선은 배 만든 기술이 많이 발전된 나라이지만 

주로 군사적으로 집중되었지 운반수단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국내 교역이 미약한 상태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외교역이 꾸준히 쇠퇴하는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 주장도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고려시대부터 사상들의 교역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해상무역 자체가 아예 소멸하고 

육로무역도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나 국경에 설치된 작은 교역소를 통한 교역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물물교환의 형식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이 가져간 물건을 진상하고

중국 황제가 이에 대한 답례물건을 하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무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가까워 제대로 된 거래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의 화폐 역시 별달리 유입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교역구조가 지금의 세계시장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명나라 역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의 구리화폐 역시 부침을 거듭했다. 

결국 문제는 구리화폐라는 속성이었다.


세번째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농공상의 사고방식이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별만 있었으므로 

이런 신분구별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도입된 유교에 의해 위의 신분구별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구별은 조선 중기 무렵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때문에 모든 경제구조가 농업을 위주로 돌아갔다. 

이러다보니 쌀이 자연스럽게 화폐의 위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상업이나 공업이 위축되어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만들고 

모자라는 물건은 쌀이랑 좀 교환해서 사오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화폐경제가 상당히 정착된 조선 후기나 구한말, 일제시대, 심지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농촌에서는 '쌀 팔아서 돈 사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쌀의 양이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재산과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척도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메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다만 이 화폐개혁의 실패이후 방치 한것으로 인해 선조때 전쟁이 발생하자 

동맹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화폐를 사용하지못하자

조선을 약탈하는 개판을 쳐놓는 결과를 불러오긴했다.


광해군의 수미법을 시작으로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와 여각등의 발달들이 계속되어 

영조,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경제가 가능했다. 

물론 그 사이에 최악의 대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과 같은 퇴보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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