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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2대 왕 2대 혜종 왕무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 

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탄생하여 

태조 4년(921)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년 5월 병오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 고려사 혜종 총서





나주 출신인 장화황후 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아버지의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으나, 

외가인 나주 오씨가 왕건의 다른 외가들보다 비교적 힘이 약한 집안이었다. 

29명의 왕비들 가운데에는 신라 왕족도 있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겹사돈, 마땅한 딸이 없어 왕족으로 대신했던 것.



혜종의 권력은 그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뒷배경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다행히 정권 초기에는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었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 있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박술희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건의 친위무장정도 되는 지위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했던 셈으로, 

결국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 

왕이 귀양가던 도중 자신도 왕규(혹은 정종)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여러모로 아버지인 왕건의 예리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겪은 인물이다. 

상기했듯 호족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왕무의 외가의 실세가 강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못했다.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호족들, 

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 명만 달랑 그에게 붙여줬을 뿐이었다. 

정작 제대로 후견인을 둔 고려왕조의 왕은 정종이었다.

왕건은 그의 둘째 아들 정종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따라서 왕건이 혜종을 정말로 후계자로 여겼는지 의문스럽다.




혜종의 부인 임씨(의화왕후)도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이자 진주(晉州) 출신으로 나쁜 가문은 아니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단한 무골이었는지 자신을 살해하려고 잠입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했고 

젊었을 시절에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본인의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며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암살 시도 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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