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1979년 10월 27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되었던 장기집권의 끝으로 정부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항하던 야권은 요동쳤다.
1978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혁명 직후의 이란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유신헌법 제정 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 집권 당시 시행하였던 이른바 '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 체제'로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차 석유 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다시 찾아온 석유 위기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또한, 한국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선언하며 YH무역에서 근로하던 여공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표이자 박정희에게 대항하던 유력한 야권 정치인 김영삼이
YH무역 여공들에게 시위를 할 수 있게끔 신민당 당사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여공들의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는데, 불행히도 여공 중 한 명인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신민당사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위의 인터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그를 제명하기 위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징계동의안에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그는 독립 이후 미 군정에서 공무를 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서 줄곧 근무하였던 착실한 공무원이었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대통령 임기를 끝마친 후 다음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은 물론,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만들어내자 반발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12월 18일 부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직에서 경질한다.
박정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최규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최규하는 김종필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과의 갈등으로 박정희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내용을 전개해보자.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경제불황과 석유를 포함한 자원문제는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하였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정을 바라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의 담화에 반발했다. 이들이 최규하의 민주화 약속 담화에도 불구하고 반발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2. 유신잔당이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즉각 사퇴하라.
그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척 하면서 일제히 정부를 규탄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등을 반대하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야 인사들을 미행하던 경찰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었다.
최규하가 담화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고 최규하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에 피선되자 하루 뒤인 1979년 12월 7일, 1975년 2월 13일 부로 대한민국에 적용되고 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의결한다.
긴급조치 9호에는 개헌 논의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최규하가 이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가 합법이 되었으며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에 의해 12.12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연행되고
김재규가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직 서리를 하던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노재현이 물러난 국방부장관 직은 前 공군참모총장인 주영복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군권의 책임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관여하여 훗날 광주 민주화 운동 청문회 등에 출석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12.12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글에 담으면 내용이 너무 장대하게 되어 요약함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과 동시에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적용되던 가택연금 조치도 해제된다. 즉,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활동이 해제된 것으로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여 개헌 의지를 내보인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떄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도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최규하는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 대통령 윤보선, 김대중 등 긴급조치위반자 687명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시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자
당시는 대학교 2학년까지 군사교육(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일부 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리 과격화 조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하였고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12.12사태 이후 군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정부 내 요직에 겸직시킨 것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애초에 병영집체훈련의 거부로 발생한 시위를 철회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연합 또한 정부에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
강원도 사북읍의 탄광 근로자 3500여 명이 사북 경찰서, 사북역 등을 점거한
사북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전국에 90여 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
노동계의 시위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더 나아가 김대중은 자신이 5월 7일 발표한 선언문에 정부가 답변하지 않을 시,
5월 22일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한국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같은 날인 5월 16일, 중동 순방의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다.
최규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부장관 김종환,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전두환 등에게
자신이 중동 순방 중일 때 일어난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음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개최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시키지 않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현 상황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하나회 소속 노태우, 박희도 등이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 이 세 사람은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국회 해산'과 '국회를 대신할 비상기구의 설치'를 요청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는 거절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야권과 학생들이 요구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대중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학생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으며 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적용받아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계엄군을 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5월 20일부로 가택연금 조치에 처해지게 된다.
정부의 계엄령 확대조치에 반발한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야권 및 재야세력이 주장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0.26사태 이후 제주도에 적용되지 아니하던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계엄령에 의해 전국 각지 대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였고 전남대학교의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시위를 주동하던 8명을 체포한다.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검거하고 진압봉으로 가격, 군화로 차는 등
시위와 진압 강도가 5월 18일보다 한층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기관단체장들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진압 행동이 과격하고 어느 나라 군대인지 모르겠으며
고교생들 또한 동용하기 시작했으니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시위의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을 방송하지 않는 MBC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 차량 1대를 불태웠다.
익명의 제보자가 "사직공원에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다"고 계엄분소에 허위 신고를 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사직공원을 수색하였으나 이는 거짓이었고, 그들은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 내부에 있던 장교가 M16소총으로 장갑차 뚜껑을 열던 시민에게 공포탄 사격을 했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공포탄에 맞은 김영찬(19세)이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광주시민 김안부(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 MBC 방송국 방화와 경찰관 사망 사건>
5월 20일이 되자 아래의 유언비어가 적힌 유인물이 나돌았다.
시위대는 MBC 방송사에 광주에서의 사태를 방송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날 뉴스에서도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방영되지 않자
분노하여 방송국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송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한편, 노동청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파할 목적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버스를 몰았는데 운전 도중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버스를 멈췄더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소요 사태가 격화되자 20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5월 21일 -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시위대의 광주 장악>
20사단의 광주 증파가 결정되자 20사단은 부대이동을 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시위대에게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를 탈취당한다.
그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구하던 정부는 이 날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에 대해 발표한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해임되고 후임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임명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장형태 전라남도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장형태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는 도중
도지사가 광주시장인 구용상에게 "먼저 나가서 시위대를 진정시켜달라"고 하였다.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흥분하여 화염병과 각목을 던졌고
결국 전남도지사는 시위대 앞에 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장형태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 여러분은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이에 시위대는 오전 12시가 될 때까지 계엄군이 광주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목적으로
버스를 몰아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초 실탄 사격이 발생한다.
사격 명령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시위대의 버스 돌진 공격으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버스 운전사가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전남 도처에 위치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하였고 무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의 출범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하였으며 LMG기관총을 이용하여
전남도청과 해산을 종용하는 군 헬기 등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전교사는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켜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며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가 총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군 차량 3대가 전복하였고 군인 2명이 사망,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무총리인 신현확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5월 22일 - 시민수습위원회의 출범과 시민군 내부의 갈등>
이날, 전남도청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수습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 본부에 찾아가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한다.
요구사항은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사후 보복하지 않으면 무장 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은 "모든 문제는 무기를 반납한 후에 논의될 수 있다"고 하였고 연행하였던 848명을 석방했다.
수습위원회는 협상 결과를 전남도청의 시위대에게 보고하면서
"무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반발하며 이들의 협상 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며 야유를 보내며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정부측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현확의 사퇴로 국무총리 서리를 하게 된 박충훈이 광주에 방문하여 특별담화를 녹음한 후 상경했다.
<5월 23일 - 계엄사의 진압 작전 논의와 총기 반납 논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진압 작전을 논의하면서 북괴 개입설을 제기했다.
"광주 소요 사태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북괴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상태"
시민군은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사체 58구를 전남도청에 전시하였고 시민군 사이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다.
온건파는 여태껏 회수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우선적으로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반납하였으나 그 후에는 강경파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24일 -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과 간첩 이창용>
이 날,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들 간에 오인사격이 다수 발생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아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하고,
공격받은 계엄군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발생한 것인데
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2명이 사망하였다.
시민군으로 오인된 마을 청년 3명, 하수구에 숨어있던 50세 여성에게
한편, 전남도청의 온건파는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고
계엄군 시내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을 약속받고
시민군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호소하였으나...
강경파는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전두환 화형식을 개최하고 가두행진을 하며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 북괴 간첩 이창용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간첩 이창용이 남해안에 침투, 광주에 들어가 선동 및 분란 행위를 하려 하였으나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 검거되었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창용이 첩보 행위의 목적으로 침투한 북괴 간첩이 맞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동 행위'라는 침투 목적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5월 25일 - 전남도청 독침사건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
전남도청의 시민군 중에 장계범과 정향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정향규는 장계범을 차량에 태워 전남도청을 빠져 나간다.
그들은 후일,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에 처해진다.
광주에 도착한 최규하는 "내가 직접 전남도청으로 가 시민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여 호소문을 녹음 한 뒤 상경한다.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칠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합시다.
<5월 26일 - 전남도청 TNT 제거와 온건파의 도주>
이 날, 전교사 교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와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배승일 씨는 이 날의 공로로 훈장을 받게 되지만 훗날 박탈당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온건파가 아래와 같이 주장하며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
그러나 강경파인 윤상원과 박남선 등이 최후 항전을 주장하였고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였으며 온건파는 전남도청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각지에 배치되었고
전남도청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홍보부 소속 박영순, 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며 시민군에게 전남도청으로 와 시민군에 합류하는 방송을 하였다.
계엄군은 새벽에 전남도청을 기습 공격하여 저항하는 시민군과의 교전을 벌였으나 쏜살같이 진압에 완료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작전을 종료한다.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성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1. 1997년 서울지방검찰청, 군 검찰부 5.18 수사보고서
2.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수사보고서
이 글은 수사보고서의 원문을 근거로 하였으나 가독성을 위하여
계엄군의 배치도와 각 날짜마다의 사망자 명단을 요약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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