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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과 언론의 영향력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스트가 좀 많긴 하지만 4.19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당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필화사건
  •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이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 이 사건은 미군정법령 88호 및 주한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향신문사는 행정처분의 가처분 신청이 수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일이 이렇게 되자 폐간을 철회하고 그 대신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했다.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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