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제32대 왕 우왕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과 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인조 때 명청 관계와 거꾸로 원을 공격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려의 복종을 확인 목적으로)
공물(심지어 공녀!)을 뜯어낸 것이
명이었던 지라 조정의 반발과 골치꺼리가 되었고,
뒤의 철령위와 함께 친명에서 거리를 두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3월,
명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이라며 강짜를 놓았다.
이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
또한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때도 창왕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할 때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라며 청했고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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